이 날도 빡쌘 일정. 열차를 계속 갈아탈 필요는 없지만 다섯 시간 하고도 10분 동안 396.2㎞를 이동해야 한다. 홋카이도 중부에서도 살짝 남쪽으로 쳐진 삿포로에서 최북단인 왓카나이까지 가야 하는 거다. 당일치기라서 돌아오는 걸 포함하면 열차 타고 이동하는 거리만 792.4㎞나 된다. 하루 동안 이동한 거리 중 단연 최고.
전 날 왕복 티켓을 12,550円 주고 샀는데 표 파는 아저씨가 할인 어쩌고 저쩌고 하더라고. 말이 빨라서 당최 못 알아듣긴 했는데 '뭔가 할인을 받은 모양이다.' 하고 말았거든. 그런데 지금 글 올리면서 확인해보니까 편도 요금이 10,450円이다. 탑승권이 7,340円이고 좌석에 앉아서 가기 위해 추가로 지불해야 하는 금액이 3,110円. 왕복이면 10,450 × 2 = 20,900인데 8,350円이나 할인 받았네. 하루 전에 사면서 왕복으로 구입해서 그런 걸까? 일본어로 말 걸고 대충 무슨 얘기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어서 좋긴 한데 일본어로 다다다다 쏴버리면 전혀 못 알아듣는다. 한 번 더 말해달라 하기도 미안해서 대충 알아들은 척 하고 있다.
삿포로 역에서 일곱시 반에 출발하는 열차를 타야 하기 때문에 일찌감치 움직여야 했다. 카메라랑 보조 배터리 정도만 챙겨서 1층으로 내려갔는데... 어라? 어제 비 온다는 예보가 있었는데 진짜 온다. 네일베 예보라서 안 믿었건만. 여행 내내 날씨 운이 좋았(다고 하기에는 너무 더웠지만)는데 삿포로에서 비를 만나는고나.
간단한 아침이 준비되어 있다고 했는데 정말 간단하다. -_ㅡ;;; 토스트랑 잼 정도가 고작. 게다가 구워진 빵은 이미 다 먹고 없어서 빵 굽는 기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빵이 구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먹을 정도는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밖으로 나갔다. 여행 가기 전에 우산을 챙길까 하다가 말았는데 '챙길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냥저냥 맞을만한 비였다. '일단 삿포로駅까지는 비 맞으면서 가고 왓카나이에서도 계속 비가 오면 편의점에서 싸구려 비닐 우산 하자 사자.' 고 생각했다.
역으로 가던 중 홋카이도 도청이 보여서 몇 장 찍었다. 다음 날 보니까 아침부터 사진 찍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삿포로駅 근처. 백화점이랑 연결되어 있고 주변에 상점도 많다. 홋카이도 제1의 도시답다.
내일은 24.1℃란다. 8월 날씨 치고는 굉장히 시원한 편. 역시 홋카이도(やっぱり北海道)!
정체 불명의 건물과 돌기둥. 의미를 모르면 봐도 감흥이 덜 하다. -_ㅡ;;; (돌기둥 보면서 양반석 생각했다.)
역 정문을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돌 기둥. 기념 사진 포인트 같아서 찍어 봤다.
어제 표 살 때 종이 쪼가리를 다섯 장 받았다. 두 장은 삿포로 → 왓카나이 탑승권과 좌석권, 다른 두 장은 돌아올 때의 탑승권과 좌석권, 길쭉~ 한 나머지 한 장은 영수증이다. 개찰구에 들어갈 때에는 탑승권과 좌석권을 나란히 겹쳐서 넣으면 OK.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역무원에게 물어봤다. 두 장 같이 넣는 거냐고. 맞다고 대답 듣고 나서 두 장 겹쳐 넣고 통과.
다섯 시간을 가야 하는데다 왓카나이에서는 돌아다니기 바쁠테니 차에서 밥을 먹는 게 낫겠다 싶어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오니기리랑 샌드위치, 음료수를 산 뒤 '커피는 자판기에서 뽑아 마셔야겠다.' 고 생각했다.
왓카나이까지 가는 특급 소야 열차. 운전석이 상당히 높게 위치하고 있다. 하루카도 비슷하게 생겼던 것 같은데.
그린샤 내부는 이렇게 생겼다. 우리나라 우등 버스처럼 3열 좌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좀 더 편하겠지, 이 쪽이.
커피 자판기는 안 보이고 우동 가게가 있더라. 이럴 줄 알았으면 일찍 가서 우동 한 그릇 먹고 열차 타는 건데...
정시에 출발. 삿포로에는 약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열차 안에는 빈 자리가 많았다. 대부분이 창 쪽 자리에 앉아 있었고 통로 쪽 자리는 비어 있는 상황. 분명 금연석인데 담배 냄새가 꽤 났다. 누군가가 담배를 피우고 있어서 그 냄새가 들어온 게 아니라, 흡연석이었던 열차를 금연석으로 바꾼지 얼마 안 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찌든 냄새였다. 아침부터 담배 냄새 맡으니 기분이 영...
바깥 경치를 보면서 사들고 간 샌드위치와 오니기리를 먹기 시작했다. 누가 보는 사람도 없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듯 했지만 뭔가 냄새 풍기면서 비닐 뽀시락거리는 게 미안해서 '한입만' 하듯이 구겨 넣고 우물거리다 삼켰다.
태블릿 꺼내어 뉴스 보다가, 졸다가, 음료수 한 모금 마시고. 책 보다가, 졸다가, 음료수 한 모금 마시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보니 음료수가 다 떨어졌다. 뭔가 마실 게 더 있었음 좋겠는데 이 놈의 열차는 자판기도 없다. 아니, 적자가 심각하다면서 열차에 자판기 가져다 둘 생각도 안 하냐. 그렇다고 판매원이 카트 밀고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한동안은 엄청난 속도로 달리더니 나요로駅 지나면서부터는 속도가 확 느려진다. 속도를 낼 수 없는 선로인 모양이다. 확실히 상태가 안 좋은지 열차가 많이 흔들렸고 그 때문에 열차 여기저기에서 비명 지르듯 삐익~ 거리는 잡음이 많이 났다. 갑자기 산짐승이라도 튀어나온 건지 가속하다가 갑자기 급 브레이크 밟는 일도 두 번 있었고.
왼쪽도, 오른쪽도, 온통 울창한 풀과 나무 뿐. 정글 속을 달리는 기분이다. 경치고 뭐고 볼 게 없다. 게다가 인터넷도 수시로 끊어진다. 와이파이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아서 손전화로 테더링 걸어놓고 태블릿으로 인터넷을 하고 있었는데 자꾸 끊어지기에 손전화를 봤더니 안테나가 아예 안 떠 있더라. 소프트 뱅크의 회선을 쓰는 라인 모바일인데 저가 이동통신이라 그런 걸까? NTT 도코모 회선은 좀 덜 끊기려나? 아무튼 긴 시간 동안 딱히 할 게 없어서 심심했다. 대각선 맞은 편의 할아버지는 노트북을 꺼내어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기에 슬쩍 봤더니 윈도 기본 게임인 솔리테어 하고 계시더만.
뒷 좌석에 앉은 사람이 내려서 마음 놓고 시트를 뒤로 눕혔는데 개미 눈꼽만큼 넘어가더니 끝이다. 자리라도 편해야 잠이라도 잘텐데 그것도 안 된다. 어차피 잔다고 해봐야 한 시간 이상 자는 건 무리지만. 그런 몸뚱이다.
사람이 많지 않은 걸 보면 자유석을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한데 할인 받아서 싸게 산 거니까, 뭐. 아무튼 세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두 시간을 더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하다. 암울한 건 돌아갈 때 이 짓을 또 해야 한다는 거다. 하아~
눈 왔을 때 비료 포대 타면 끝장나겠다 싶은 언덕이 나오는 걸 보니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소를 풀어놓고 키우는 것 같더라. 넓은 초원을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멋진 풍경이다.
삿포로를 떠난 지 다섯 시간이 지났다. 슬슬 도착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열대 우림 아닌가? -_ㅡ;;;
예정보다 몇 분 늦게 도착.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아서 플랫폼 맨 뒤로 가 선로를 찍으면서 빈둥거렸다.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가장 먼저 옷부터 꺼내어 입었다. 음... 좀 쌀쌀한 것 같기는 하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지만 흐린 날씨였기 때문에 아마도 20℃ 언저리가 아니었나 싶은데. 내가 '시원하고 딱 좋네!' 라고 느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살짝 춥게 느꼈을 게다. 옷을 껴입은 후 죄다 여기저기에서 사진을 찍기 바쁘더라. 배경에 사람들이 나오지 않게 사진을 찍고 싶었으니까 일부러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냈는데 좀처럼 사람들이 플랫폼에서 떠나지 않는다. -ㅅ-
타고 온 열차의 꼬랑지 부분. 방향을 바꿔서 여기를 머리로 한 채 삿포로로 돌아가겠지. 이따 다시 만나자.
일본 최북단, 왓카나이駅입니다.
삿포로에서 396.2㎞ 떨어져 있다고 쓰여 있다. 직선 거리가 아니라 JR 열차 선로 길이가 기준일 거다.
도쿄로부터는 무려 1,547.9㎞ 떨어져 있다고 나온다. 오사카에서 온 나는 2,000㎞ 이상을 이동해서 온 거다.
여기저기에 일본 최북단 역임을 표시하는 상징물들이 가득하다.
저 앞에 보이는 콘크리트와 쇳덩어리 역시 최북단 역임을 알리는 상징이다. 선로 종점 표시.
역 안에 들어가서 보면 이렇게 생겼다. 배경으로 소야 열차가 보이니 뭔가 있어 보이는 듯(나만 그런가. -ㅅ-).
원주민들이 타고 다녔을 개썰매의 모형과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겨울에 오면 체험도 하고 그러는 모양.
여기서 나의 무지가 또 한 번 드러나는데... 시원하기에 '북쪽이니까.' 정도로만 생각했다. '겨울에 눈 오면 엄청 추울텐데, 대략 서울의 추위와 비슷하려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구글 지도에서 찾아보니 러시아의 우수리스크와 거의 같은 위치다. 서울? 서울은 한참 아래다. 연변보다 위 쪽이고 하얼빈과 거의 같은 위치다.
나중에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최북단 역에도 갔었다!' 고 자랑하려고 부지런히 사진을 찍어댄다.
이게 원래의 선로 종점 표지였는데 역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선로 종점이 조금 더 남쪽으로 옮겨졌단다.
└ 생긴 건 이 쪽이 더 새 것처럼 생겼는데. 이 쪽이 나중에 만든 거 아닌가? -ㅅ-
주변에 사람들 안 나오게 찍으려고 한참을 카메라 들이대고 있다가 건진 사진. 마음에 든다. ㅋ
먼저 다녀온 사람들의 블로그에서 본 것처럼 정말로 일본어와 러시아어가 같이 쓰여 있었다.
방파제 건물에 대한 안내가 보인다. 저기도 가봐야지. ㅋ
부지런히 사진을 찍은 뒤 화장실에 갔다가 터미널 쪽으로 갔다. 역 건물과 붙어 있어서 찾는 게 전혀 어렵지 않더라. 일단은 소야 곶부터 다녀와야 한다. 열차에서 내려 가장 빨리 탈 수 있는 버스는 13:20에 출발하는 거. 소야 곶까지는 50분이 걸린다. 돌아오는 버스 시간은 14:51.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미리 알아봤을 때에는 15:01이었는데 시간이 바뀐 모양이다. 만약 14:51에 역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지 못한다면 다음 버스는 17:56에나 있다. 당연히 17:46에 출발하는 삿포로 행 특급 열차는 탈 수 없다. 버스 놓치면 택시 불러서 타거나 히치하이킹 하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다.
운전석 위치가 반대인데다, 깜빡이와 와이퍼 조작 레버도 반대, 기어를 왼손으로 조작해야 하는데다, 우리나라와 달리 좌회전이 비보호라는 것까지 이겨낼 수 있다면 한국에서 미리 국제 운전 면허증을 발급(받는 게 전혀 어렵지 않다.)받아 와서 렌트 카로 다니는 게 훨씬 편하다. 여기저기 이동하기도 편한데다 차도 많지 않아서 운전이 어렵지도 않다. 하지만 나는 국제 운전 면허증으로 운전할 수 없는 처지. 장기 체류자인 유학생은 국제 운전 면허증으로 운전하면 안 된다. 일본 면허를 발급 받아야 하는데 아직 일본어가 서툴다는 이유로 발급 받지 못하고 있다.
버스 정류장 앞에 서서 버스를 기다렸다. 잠시 후 관광 버스가 한 대 와서 멈췄다. 삿포로까지 가는 버스. 열차가 아니라 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도 많은 모양이다. 가격은 고만고만한 듯. 나는 소야 곶으로 가는 시내 버스를 탈 거니까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뒤에 있던 사람이 "에?" 하더니 캐리어를 끌고 앞으로 가서 버스를 탄다. 소야 미사키로 가는 버스와 삿포로까지 가는 버스가 같은 정류장에서 멈추는데 줄 서는 것에 대한 안내가 없다 보니 같이 줄 서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소야곶(소야 미사키) 가는 버스 시간표. 삿포로에서 출발해 당일 치기로 다녀오려면 루트는 하나 뿐이다.
07:30 삿포로 출발 / 12:40 왓카나이 도착 / 13:20 소야 미사키行 버스 탑승 / 14:10 하차 / 14:51 왓카나이行 버스 탑승 / 15:43 도착 삿포로로 돌아가는 열차는 17:46 출발이니 두 시간 사이의 일정은 제각각. 다만 돌아가는 열차를 놓치면 삿포로로 돌아가는 방법이 없으니 절대 늦는 일 없도록 일정을 잘 짜야 한다.
제 시각에 버스가 와서 올라탔다. 소야 곶까지의 왕복 버스비는 2,500円. 터미널의 매표소에서 미리 구입하면 도도독~ 하고 뜯어 낼 수 있는 표를 따로 준다. 내릴 때 내면 된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 떼가 우르르~ 버스에 탔다. 한국 할머니들과 다른 게 1도 없음. 엄청 시끄럽다. ㅋ 그 와중에 내 옆에 앉은 할머니는 가방을 맨 채로 자꾸 이리저리 몸을 돌려가며 수다 떠느라 정신이 없다. 가방이 내 몸에 부딪치는 걸 느끼지 못할 리가 없는데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일도 없이 떠드느라 난리도 아니다. 앞에 앉은 할머니한테 모자 벗어보라고 하더니 새로 머리한 게 예쁘다고. ㅋㅋㅋ
교회인지 성당인지 부서진 채 방치된, 꽤나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도 있고.
저 멀리 보이는 왓카나이 공항. 신 치토세(삿포로)와 하네다(도쿄) 공항을 왕복하는 정기편이 있다고 들었다.
└ 일본 최북단 공항은 레분 섬에 있는데 정기편의 운항이 모두 중지되는 바람에 지금은 이용할 수 없단다.
정확히 14:10에 소야 곶에 도착.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린다. 그 와중에 내 옆에 앉은 할머니는 종점까지 가는 자기가 벨 눌렀다며 좋아하고. ㅋ
근처의 볼거리를 안내하고 있는 지도. 한글로도 안내가 되어 있다.
일본 대부분의 지역에서 한글 안내가 보이는 걸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오긴 많이 오는 모양. 아베 ㅺ가 헛 짓 하면서 그걸 발로 걷어 찼으니.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중국이나 동남아 등 기타 나라에서는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이 타이밍에 일본 대체할 수 있다고 홍보해서 관광객 끌어 가는 게 좋을텐데.
'마미아 린조' 라는 일본의 탐험가인데 막부의 명령으로 이 쪽을 탐험한 공로가 있다고 쓰여 있다.
저 멀리 보이는 섬에, 대체 뭐가 있는 건지 새 떼가 난리인 모습이 보여서 잽싸게 찍어 봤다.
일본 최북단임을 알리는 조형물. 다들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어서 사람 안 나오게 찍으려고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썰물 때라 물이 깊지 않아서인지 새들이 부지런히 이것저것 건져(?) 먹고 있었다. 뷔페 개장인 거지.
모처럼 왔는데 측면 사진만 찍으면 아쉬우니까 정면에서도 한 장.
최북단 조형물 사진 찍었으니 됐다. 이제 뒤 쪽 언덕에 올라가서 구경해야지. 시간이 없다.
러시아 쪽을 감시하는 해안 초소였다고 한다.
안 쪽에는 아무 것도 없다. -ㅅ-
평화의 비란다. 미국 잠수함이 침몰해서 승무원 80명이 전사한 장소에 위령비를 세운 것이라고.
이 와중에 저들이 침몰시킨 미국 잠수함 역시 일본인들 많이 죽였다는 얘기를 꾸역꾸역 써놨다. 반성을 반성 같이 안 하고 있다. 그냥 미안하다로 딱 끝났으면 얼마나 좋아.
이것도 태평양 전쟁에서 죽은 일본 해군들을 위해 세운 위령비다. 추모하고 싶은 마음이 1g도 없다.
뜬금없이 등장한 라멘 가게와
멀어서 가보지 않은 풍차. -ㅅ-
언덕 위의 온갖 조형물 중 가장 커다란 건 KAL기 희생자 위령탑이다.
이렇게 세 개의 조형물이 나란히 있어서 연관성 있는 걸로 오해하기 쉬운데, 전혀 별개의 시설이다.
평화의 종. 세계 각지에서 동전과 메달 등을 기증 받은 뒤 그걸 녹여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세계 98개국에서 기증 받은 동전과 메달을 녹여서 어린이들의 행복과 세계 평화를 위해 만든 종이라고 한다.
1983년 9월 1일, 뉴욕을 떠나 김포 공항으로 향하던 대한항공 KE007 비행기가 항로를 이탈해서 사할린 상공에 진입했다. 구 소련 전투기가 출동해서 공대공 미사일을 쏴버렸고 미사일에 맞은 여객기는 그대로 추락하여 승객과 승무원 269명이 모두 사망. 국적 표시도 분명하고 누가 봐도 일반 여객기인데 사전 경고 조치 없이 바로 미사일을 쏴버렸기 때문에 말이 많았다. 구 소련 측에서는 미국의 사주를 받은 정찰기였다는 음모론을 꺼내기도 하는 등 제대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항로를 이탈하여 다른 나라의 영공을 무단으로 침입한 것은 불명 잘못이지만 그것이 공대공 미사일을 맞을 정도의 일이었을까? 그렇게 따지면 지금도 수시로 우리 영공을 침입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의 정찰기들은? 나라에 힘이 없어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뭐라고 할 수도 없던 시절의 이야기이고, 어찌 보면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일이다.
당시 사망자 명단. 정찰기라면 이렇게 많은 사람을 태우고 있을 리가 없다.
고개 숙여 묵념하고 왔다. 시신조차 찾지 못했을테니 희생자 가족들의 한이 오죽했으랴.
세계 평화 기원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세 시설의 관계가 전혀 없다고 보기 어렵지만 나는 저 두 개의 종이 KE007편 희생자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느껴졌다.
라멘이라도 먹고 가야겠다 싶었는데 방금 전까지 영업하던 가게가, 오늘 영업 끝났다고 걸어 놨다. -ㅅ-
가장 가까운 또 다른 육지가 사할린.
홋카이도에서 100만 톤 이상의 우유를 생산한 것과 젖소가 50만 마리 넘은 것을 기념해서 세웠단다. -ㅅ-
고만고만한 언덕이 온갖 조형물로 가득해서 미술관 야외 전시장 같은 걸 보는 기분이었다.
흐린 날씨이긴 했지만 20℃ 밑으로 떨어지다니, 8월의 오사카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기념품 가게. 100円 짜리 엽서와 선물용 열쇠 고리를 몇 개 샀다.
버스에서 내린 뒤 돌아가는 버스를 탈 때까지 주어진 시간은 40분 정도. 구경할 것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안내문을 천천히 읽어보고 여유있게 둘러보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대충 건너 뛰면서 봤기 때문에 기념품 가게에라도 들렀지, 그렇지 않음 기념품은 구경도 못할 뻔 했다. 바이크 투어러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줄 서 있는 사람이 꽤나 많아서 앉아서 갈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올 때 앉았던 자리에 그대로 앉을 수 있었다. 바다를 보고 가는 자리였기에 버스 안에서도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다.
시내 버스 50분 타는데 13,000원이면 엄청 비싼 것 같기는 한데. ㅠ_ㅠ
내 앞자리에는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알 수 없지만 영어를 쓰는 덩치 큰 처자가 앉아 있었다. 아까 역에서 올 때에도 같은 버스를 탔고, 구경하면서도 몇 차례 마주친 처자다. 나풀거리는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멀리에서도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처자였는데 나처럼 당일치기로 온 듯 했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똥꼬가 빤스를 먹었는지 손으로 떼어낸다. 떼어낸 빤스의 고무줄이 무척이나 튼튼했는지 짝! 소리를 내며 제 자리(?)로 돌아간다. 아니, 이게... 보려고 보고 들으려고 들은 게 아니라고. 버스 내리는데 바로 앞에서 그러고 있었다고. 시선을 돌렸는데 짝! 소리가 들렸다고.
버스에서 내려 근처를 방황하기 시작. 어설프게 그려진 아톰이 눈에 들어왔다.
스프 카레가 유명하다고 한다. 보통의 카레보다 훨씬 묽은 카레라는데... 여행하는 동안 한 번도 안 먹었다.
신사인지 절인지. 근처에 가서 입구만 찍고 다시 역 쪽으로 돌아갔다.
다녀온 사람의 블로그 글을 보니 버스로 노샷푸 곶까지 다녀올 시간이 됐다고 하던데... 나는 방파제 보는 게 먼저라서 방파제 보고 나면 도저히 시간이 안 될 것 같더라. 택시 타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다녀오는 건 가능할 것 같기도 했지만,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다니는 건 전혀 내 스타일이 아닌지라... 노샷푸 곶에 가는 건 포기했다.
저 멀리 보이는 방파제. 이 쪽에서는 그냥 기둥만 보일 뿐이다.
민박 집. 이런 곳에서 하루 묵었음 좋겠다 싶지만... 너무 비싸다. 심지어 비즈니스 호텔도 비싸다, 이 동네는.
뭔가 우리나라의 낡은 아파트 같은 느낌. 일본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긴 한데 여긴 좀 삭막할 것 같다.
방파제에 도착.
바이크 투어러들의 야영 장소로 자주 사용되어 이렇게 금지 표지를 붙여놓은 것이란다.
할머니 한 분이 운동이라도 하시는지 여러 번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배 옆에 전광판 같은 게 있기에 뭔가 싶어 봤더니 해안 경비대 함정이었다.
뭐하는 건물인지 몰라서 안 쪽을 슬쩍 들여다보는데 안에서 식사하던 분과 눈이 마주쳐서 민망했다.
역 바로 옆에 있던 건물. 시간이 넉넉하니 여기에서 밥이라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하필 브레이크 타임이다. 어쩐지 안 쪽이 어둡고 조용하더라니. 가는 날이 장날이다. 에휴...
커피라도 한 잔 하고 싶었는데 역 안에 있는 카페의 처자가 무척이나 바빠 보인다. 주문하는 곳에서 한참 기다렸는데 올 생각을 안 한다. 그냥 밥이나 먹자 싶어 바로 옆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메뉴를 보니 게 살을 얹은 밥도 있고 가리비를 넣고 볶은 밥도 있다. 평소의 나라면 당연히 이 쪽을 주문했을텐데 날씨가 쌀쌀하다 보니 뜨끈한 국물이 먹고 싶어서, 고민하다가 라면을 주문했다. 辛(매울 신)자 보고 주문했는데 역시나... 1도 안 맵다. 숙주가 아삭아삭 씹히는 건 좋았지만 딱히 맛있다고 하기는 어려운 맛. 면을 다 건져 먹고 국물을 한 숟갈 떠 마시는데... 어라? 별 맛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중독성이 있다. 한참을 떠 먹었다.
식당에서 나오면 바로 기념품 가게. 가방이 무거워지는 게 싫어서 열쇠 고리 따위만 보고 다녔는데 마땅히 살 만한 게 없다. 게다가 누구한테 선물할지도 정하지 않았다. 마사미 님께는 여행 끝나는대로 택배를 보낼 생각이긴 한데 학교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랑가. 나카모토 선생님이랑 모토조노 선생님, 담임 선생님한테는 선물 드려야 할 것 같은데.
한참을 둘러 봐도 딱히 사고 싶은 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고민하다가 멜론이 들었다는 젤리와 과자를 두 개씩 집어 들었다.
열차 탈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는 편. 딱히 할 것도 없고 해서 역 건물 2층으로 올라갔더니 놀이방 같은 것도 있고 깔끔하게 잘 꾸며놨더라. '시골 역 치고는 제법인데?' 라 생각했는데 역 건물이라 그런 게 아니라 멀티 플렉스 극장 있는 곳이라 그런 거였다. 역 건물이 극장, 쇼핑몰 등과 하나로 되어 있어서. -ㅅ-
무료 와이파이에 연결해서 태블릿으로 게임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슬슬 준비해야겠다 싶어 일어났다. 화장실에 갔다가 나오니 극장 매표소 앞. 『 날씨의 아이(天気の子, 텐키노코) 』 굿즈가 전시되어 있는데 오사카의 극장에서 봤던 것에 비하면 많이 빈약하다. 딱히 살 게 없다 싶어 굽혔던 허리를 펴자 아까 그 보라색 처자가 눈에 들어온다. 또 만났다.
인사라도 할까 하다가 뻘쭘해서 관뒀다. 혹시라도 삿포로 역에서 다시 만나면 몇 마디 건네봐야겠다(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ㅅ-).
플랫폼으로 가니 열차는 이미 도착해 있지만 문은 열리지 않은 상태. 청소하고 있는 것 같더라. 커피라도 하나 사서 타야겠다 싶어 아까 그 카페로 가니 그 사이에 영업 종료.
기념품을 샀던 가게에서 캔 커피랑 음료수 하나를 샀다. 에키밴도 살까 했는데 영 맛 없어 보여서 안 샀다.
갈 때에는 오른쪽 좌석이었는데 이번에는 왼쪽 좌석. 같은 쪽 풍경만 보고 가는 거다. 뭐, 어차피 해 지고 어두워지면 아무 것도 안 보일테니까 관계 없다.
잠도 안 오고 해서 태블릿으로 책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번 여행에서 책을 많이 본 게 나름의 소득이라면 소득. 그동안 다운로드 받아 놓기만 하고 읽지도 않았던 책들을 꽤 읽을 수 있었다. 길고 긴 다섯 시간이 지나고 23시가 되어서 삿포로駅에 도착.
왓카나이에는 비가 오지 않았지만 삿포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냥저냥 맞을만 하겠다 싶어서 우산 안 사고 그냥 밖으로 나갔는데... 역시나 나는 아메노오토코(雨の男 = 비의 남자 = 가는 곳마다 비가 내린다). 밖에 나가자마자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쏴아아~ 쏟아진다. 신호 기다리던 잠깐 동안 흠뻑 젖어 버렸다. 이미 젖은 거, 우산 사지 말자고 생각해서 숙소까지 계속 걸었다.
어차피 숙소에 가면 샤워할 거니까 젖는 건 상관 없는데, 조심해서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발이 젖어 버렸다. 양말 끝부분이 젖어 오는 더러운 기분. 아아악!!!
23시가 넘었는데도 1층 리셉션에 불이 켜져 있고 스태프들도 있기에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기에 최대한 바닥에 안 떨어지게 수습을 하고, 맥주 한 병을 마신 뒤 위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국어가 들린다 싶더라니, 한국 놈이 4층 엘리베이터 타는 곳 앞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갔는데도 통화하는 목소리가 고스란히 다 들린다. 어디 나가던가 1층 리셉션에 갈 것이지 출입문 바로 앞에서 저 질알인지. 통화하는 거 들어보니 중요한 내용도 아니고 일본인들은 낮부터 술 먹더라 하는 개뿔 쓰잘데기 없는 얘기를, 여자도 아니고 남자한테 하고 있더만은. 쯧.
샤워하러 들어갔더니 사용한 수건과 매트를 그대로 두고 갔다. 시설이 좋으면 뭐하나. 쓰는 것들이 개차반이면 아무 소용 없는 거다. 대체 어느 나라에서 온 개념 없는 ㅺ인지. 남이 쓴 수건과 매트를 걷어 빨래통에 던져 놓은 후 문 잠그고 샤워. 씻고 내려올 때까지도 아까 그 ㅺ는 통화하고 있더라. 지나가면서 들으라고 "시끄럽게, ㅽ!" 이라고 작게 말했는데 못 들었는지 꼼짝도 안 한다.
침대로 돌아와 짐 정리를 했다. 내일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 체크 아웃 시간까지 느긋하게 있다가 가면 된다. 힘든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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