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3일부터 1월 7일까지, 4박 5일의 여행 이야기입니다. 사진은 100장 미만, 얼마 안 되지만(-_ㅡ;;;) 글이 오질라게 많습니다. 스크롤의 압박을 이겨내고 천천히 읽어주신 뒤 맨 아래의 하트 눌러주시면 2019년에 복 받으실 겝니다요. ㅋ
【 친구들이 놀러 온다 】
속된 말로 '불알 친구' 라 부르는, 나름 순화한답시고 'FireeGG Friends' 라 부르는 녀석들이 일본에 놀러 왔다. 내가 일본에서 유학할 때 일본 여행 하고, 멤버 중 한 녀석이 미국에 유학 갈 때 미국 여행 하고,... 이런 식으로 하자고 얘기했었는데 그걸 행동으로 옮긴 거다.
나이 먹고 각자 살기 바빠지면서 자주 볼 수 없게 되어 '최소한 1년에 한 번 정도는 모여서 같이 여행이라도 하자' 는 말이 수 년 전에 나왔고, 대충 계획 짜서 일정 맞춘 뒤 여행을 했었더랬다. 그러다 나 빼고 전부 가족이 생기면서 우리끼리 다니는 게 애매해져서 세 번에 한 번 정도는 가족 동반으로 놀기로 했고. 그렇게 가족이 다 움직이려면 돈이 꽤 드는데 갑자기 준비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을테니 매 월 3만원씩 모으기로 했다. 그 회비 들고 이번에 놀러 온 거다.
나는 일본에 있으니까 친구들 셋이 비행기 표 끊어서 오는 걸로. 일정을 짜야 숙소를 잡을텐데 죄다 '네가 잘 아니까 네가 해라' 는 식으로 말하고 있으니 속이 터진다. 나는 이미 숫하게 갔던 교토, 오사카니까 처음이거나 안 가본 곳을 말해야 하는데 죄다 나한테 떠맡기는 분위기인 거지. 실은 예전부터 이런 식으로 했었다. 내가 총무도 맡고 그랬으니까 여행 일정도 내가 짜고 필요한 건 내가 준비했었다. 그나마 넷 중에서는 내가 제일 꼼꼼한 편이었으니까.
친구들 입장에서는 늘 하던대로 하자는 것이었는데 내가 유난히 짜증스럽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여행 시작 전부터 좋지 못하다.
【 첫날, 교토 역 】
공항에 마중 나가서 끌어안고 어쩌고 하는 건 1도 어울리지 않는 우리니까, 교토 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집에서 빈둥거리며 여유 부리고 있다가 구글 지도로 다시 확인해보니 시간을 착각했다. 당장 나가야 늦지 않을 것 같았다. 부랴부랴 씻고 출발. 텐노지駅에서 하루카 타면 가장 편하겠지만 하루카는 비싸니까... 오사카駅까지 간 뒤 JR 타고 교토에 갔다. 친구들 도착할 시간에 맞춰 간 거였는데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처음 생각했던대로 움직였으면 오래 기다리지 않았을텐데. -ㅅ-). 인터넷으로 미리 알아보니 우체국에 짐을 맡길 수 있다고 해서 거기에 갔는데... 15시 전까지 되찾아가야 한단다. 친구들 만나서 근처 구경하고 밥 먹고 어쩌다 보면 15시 훌쩍 넘어갈 건데 안 되겠다 싶어 그냥 나왔다(원래는 09시 ~ 18시 이용 가능하고, 짐을 찾는 건 19시까지 가능하다고 되어 있다. 내가 갔던 날은 신년 연휴 때문에 평소보다 빨리 끝나는 게 아닌가 싶다. -_ㅡ;;;). 캐리어 맡기는 곳을 미리 알아보려고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는데 코인 라커는 전부 사용 중. 어딘가에 맡길만한 곳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계속 헤매다가 지하 1층에서 짐 맡기는 곳을 발견했다. 700円 내고 맡겼다.
교토駅 중앙 출구로 나간 뒤 오른쪽으로 가면 아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있습니다. 그걸 타고 지하 1층으로 내려간 뒤 왼쪽을 보면 짐 맡기는 곳이 보입니다. 짐 하나에 700円입니다. 자판기로 표를 구입하는 시스템인데 직원들이 다 도와줍니다. 자판기로 표를 받은 뒤 짐을 맡기고, 나중에 되찾을 때 그 표를 보여주면 됩니다. 표 잃어버리면 골치 아프니까 조심하시고요. 교토駅에는 이곳저곳에 코인 라커가 많이 있습니다만, 아침 일찍 가지 않는 이상 죄다 사용 중일 겁니다. 참고로 이 곳에 짐을 맡겼을 경우 20시 전까지 찾아가면 됩니다.
조금이라도 아껴야겠다 싶으면 우체국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중앙 출구로 나와 직진, 건물 외부로 나갑니다. 정면에 교토 타워가 보일 건데요. 그 상태에서 왼쪽으로 꺾어 계~ 속 걸어갑니다. 그러면 길 끝에 교토 중앙 우체국이 보입니다. 우체국에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가면 곧바로 짐 맡기는 곳이 보입니다. 여기는 짐 하나에 600円입니다.
인포메이션 센터에 가서 다시 한 번 우타노 유스 호스텔까지 가는 버스를 확인하고, 지도를 받아왔다. 아직 한참 더 기다려야 해서 이세탄 백화점 꼭대기의 전망대 벤치에 앉아 스도쿠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 날 반바지 입고 있었는데 교토에 도착할 때까지는 전혀 춥지 않았다. 하지만 바깥에서 한 시간 가까이 찬 바람 맞고 있었더니 몸이 덜덜덜 떨려 오더라. 그렇게 한~ 참을 밖에서 빈둥거리고 있다가 친구 녀석들 도착할 때가 되어 아래로 내려갔다. 이미 중앙 출구로 빠져나와 카카오 톡으로 전화 걸고 있더라. ㅋㅋㅋ
교토駅은 언제 오더라도 바글바글하다. 외국인 관광객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많다.
유리에 뒤 쪽 건물이 반사되어 구름에 숨은 UFO처럼 나왔다. ㅋㅋㅋ
아베노 하루카스가 보이기에 줌으로 당겨 찍어봤다. 우리 동네랍시고 반갑다. ㅋ
만나서 캐리어 보관하는 곳까지 안내한 뒤 짐을 맡겼다. 라멘 먹자고 한 뒤 위로 올라갔는데, 사람들이 바글바글. 줄 서는 게 싫어서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지만 어디를 가도 죄다 대기하고 있는 줄이 있다. 결국 줄이 가장 짧았던 라멘 가게로 가서 자판기로 주문을 하고 앉아서 기다렸다. 줄 서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줄 서더라도 먹고 싶은 걸 먹고 싶다는 사람도 있고, 네 명 밖에 안 되는데 제각각이다. 그래도 다른 사람 배려한답시고 강하게 우기는 사람은 없지만 분명 불만은 있을테지. 이제는 같이 여행 못 다니겠다는 생각을 이 때 처음으로 했다.
【 히가시혼간지 】
주문한 라멘이 나와서 그걸로 요기를 하고, 히가시혼간지에 갔다. 히가시혼간지는 불과 한 달 전에 다녀온 곳(http://40ejapan.tistory.com/131). 미리 인터넷으로 알아본 간단한 역사를 설명해줬는데 그닥 관심있게 듣는 것 같지는 않다. 적당히 둘러보고 나왔다. 다음으로 쇼세이엔에 갔는데 이미 입장 마감. 결국 '좀 어두워진 뒤 야경 보러 가자' 고 했던 교토 타워에 일찌감치 올라가기로 했다. 가던 중 한 무리의 젊은 남자 애들 사이로 지나가는데 내 반바지 차림을 보더니 "寒い(さむい: 추워)!" 라고 한 마디 한다. "寒くない(さむくない: 안 추워)!" 라고 받아쳐줬다. 껄렁껄렁한 애들이 시비 거는 것처럼 보였는데 다행히 아무 일 없었다.
주절주절 다 쓰려면 너무 길어지니까 간략하게 혼간지에 대해 적어보자면... 오다 노부나가가 전국 통일을 위해 부지런히 싸움질하고 있던 시기, 혼간지는 오다 노부나가의 적대 세력과 손을 잡습니다. 혼간지가 커지면서 중들이 깝치기 시작했는데 오다 노부나가는 중들의 요구를 고분고분 들어주지 않았거든요.
전국 통일을 위해 이 쪽, 저 쪽에서 부지런히 싸워대야 하는데 싸우러 나갔다 하면 혼간지에서 신도들 동원해서 반란 일으키고 그러니까 오다 노부나가는 속이 부글부글 끓을 수밖에요. 결국 날 잡아서 혼간지 중들 때려잡기 시작하는데 그 때문에 불교 신도들 민심이 돌아서서 꽤나 오랫동안 고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걸 지켜봤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권력을 잡은 후 혼간지를 반으로 쪼개 버립니다. 원래 혼간지의 동쪽에 히가시(東: ひがし: 동) 혼간지를 지은 거지요. 그래서 원래 혼간지는 니시(西: にし: 서) 혼간지가 됩니다. 교토駅에서 교토 타워 옆의 큰 길 따라 쭈욱 걸어가면 히가시혼간지가 있고요. 그 서쪽에 니시혼간지가 있습니다. 히가시혼간지와 니시혼간지는 1.8㎞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 교토 타워 】
교토 타워는 사실 올라가봐야 별로 볼 게 없다. 교토 주변을 둘러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굉장히 높은 전망대도 아니고, 주변 풍경이 딱히 좋은 것도 아니고. 물론 내가 갈 또는 갔던 관광지나 유적지가 어디쯤인지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게 참 좋긴 한데 입장료를 생각하면 확실히 돈이 아깝다.
저 멀리 아베노 하루카스가 뿌옇게 보이기에 찍어봤는데... 역시 사진으로는 전혀 안 보이네. -_ㅡ;;;
번갯불에 콩볶아 먹듯 둘러보고 나오는데 공짜라면서 사진을 찍어준단다. '일본 애들이 공짜로 사진을 찍어줄 리 없다' 는 생각으로 괜찮다고 거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손가락 한 마디 정도나 될 정도로 작은 사진은 공짜로 주지만 일반 사진 크기로 인화한 건 1,300円인가 받고 팔더라. 그럼 그렇지.
친구 녀석들 중 한 명이 비염 때문에 코가 자주 막히는데 그 때마다 쓰는 약을 한국에 두고 왔다더라. 일본에 있는 동안 쓸 약을 사야 한다고 해서 근처 드럭 스토어로 갔다. 1,000円 조금 넘는 제품이 있고 2,000円 넘는 제품이 있는데 무슨 차이냐고 물어본다. 내가 약사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아. -ㅅ- 얘들은 고작 2개월 공부한 거 가지고 내가 일본어 굉장히 잘 하는 줄 안다. 일본어 배웠지 않냐면서. 야, 이, ㅆㅂ 그렇게 따지면 중, 고등학교 6년 동안 영어 공부한 네 놈들은 왜 외국인 만나도 영어 한 마디 못하고 어버버~ 하고 있는 건데?
아무튼 그나마 넷 중에 일본어는 내가 제일 잘하는 수준인지라... 약 두 개 들고 가서 "비염이 있으니까 어느 쪽이 좋습니까? 뭐가 다릅니까?" 라고 엉망진창으로 물어봤다. 물어보는 거야 번역기 돌려서 미리 좀 보고 대충 머리 속으로 시뮬레이션 한 뒤 그대로 내뱉으면 되지만, 상대가 하는 얘기를 얼마나 알아듣느냐는 또다른 문제. 드럭 스토어 직원도 두 약을 번갈아가며 한~ 참 보더니 1,000円 조금 넘는 제품이 좋겠다며 그걸 추천해주더라. 계산하고 나오면서 '한국 같으면 틀림없이 비싼 거 사라고 했을 거다' 라며 하늘 보고 침뱉었다. -ㅅ-
【 우타노 유스호스텔 】
짐 맡겼던 곳으로 가서 캐리어 찾은 뒤 버스 타는 곳으로 이동. D3 승차장에서 26번 버스를 탔다. 숙소인 우타노 유스 호스텔까지는 한 시간 가까이 가야 한다. 한~ 참을 가서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앞에 건물이 보인다. 뭔가 애매하거나 모르겠다 싶으면 나를 앞세우는 녀석들이, 확실하다 싶으면 저들이 먼저 움직인다. 우르르~ 가기에 그 쪽이 맞나보다 하고 따라 갔는데 문이 잠겨 있다. '예전에 왔던 것과 뭔가 다른데?' 싶어 다시 확인해보니 숙소는 반대 쪽. -_ㅡ;;;
캐리어 끌고 반대쪽으로 가서 체크인 했다. 우리 방은 208호. 체크인 하고 나서 시트만 받아들고 방으로 가려는데 100円씩 내고 빌린 수건을 못 받았네? 걷다가 급정지 후 수건 받아들고 방으로 갔다. 그런데... 문이 잠겨있다. 응? 열쇠가 있어야 하나? 다시 프론트로 가서 열쇠가 없다고 하니까 놀라더니 미안하다 사과하며 열쇠를 준다.
문 열고 들어가 각자 침대 하나씩 차지. 시트 깔고, 이불 덮기 전에 홑이불 덮는 시스템은 나 빼고 전부 처음인 듯 하다. 시트 까는 것과 이불 덮기 전에 홑이불 덮는 걸 알려주고 난 뒤 먹을 거 사러 나갔다. 네 명이 우르르~ 다 갈 필요는 없으니까 총무 맡고 있는 녀석과 나만 출발. 체크인 할 때 근처 마트와 편의점 위치를 물어보긴 했는데... 지도에서 보는 것보다 훨~ 씬 멀다.
한~ 참 걸어가니 저 멀리 로손이 하나 보이는데, 그 맞은 편에 제법 큰 마트가 있더라. 마트에서 술이랑 먹을 거 사고, 배 고플 때 먹을만한 게 없어서 편의점에 도시락 사러 갔다. 일본에서 한동안 '악마의 오니기리' 라고 해서 엄청 유행이었는데 지금은 한물 갔는지 그게 잔뜩 남아 있기에 네 개 집어들었다. 마트에서 산 것들은 전부 상자에 담았는데 제법 무겁다. 친구 녀석과 번갈아가며 들고 왔다.
숙소 도착한 뒤 식당에 가서 술 마시기 시작. 우리 말고 한국인 남자 애들이 셋인가 넷인가 왔던데 뭔가 요리하다가 태워 먹었다. 식당 안이 흰 연기로 가득해지고, 온통 탄 냄새. 다른 사람들이 전부 놀라서 허둥지둥하고 급기야 스태프 등장. 난리다, 난리. 그래도 젊은 친구들이 가정 교육 잘 받았다 싶었던 건 시간이 꽤 지난 후 식당에 있던 사람들에게 가서 미안하다면서 사과하고 다니던 거. 요즘 젊은이들 같지 않게 반듯하다 싶더라고.
사들고 갔던 거 다 먹고 방에 들어가서 잤다. 하필 내 침대 위를 코 제일 심하게 고는 녀석이 차지하는 바람에 새벽에 여러 번 깼다.
【 둘쨋날, 키요미즈데라 】
자고 일어나 씻고 나왔다. 전 날 술 마시면서 급하게 짠 일정대로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가장 먼저 갈 곳은 키요미즈데라(清水寺: 청수사). 나는 이미 여러 차례 다녀왔고 오사카 쪽 여행을 여러 번 한 녀석도 간 적이 있다고 하는데 일본 여행 두 번 한 녀석은 가본 적이 없단다. 방사능 걱정으로 일본 땅 밟을 생각도 안 하고 살아온 녀석은 당연히 가본 적이 없고.
관람로를 따라 돌다가 멀찌감치에서 본당 찍는 게 딱인데, 본당 건물이 공사중이다. 지지리 복도 없는 녀석들. ㅋㅋㅋ
건강, 학업, 연애의 성공에 효과가 있다는 오토와 폭포(音羽の瀧).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다. 줄 서서 물 먹는 건 바보 같다 생각한다.
사랑을 이뤄준다는 지슈 진자(地主 神社). 저 돌 앞에서 눈 감고 걸어 꽤 떨어져 있는 반대 쪽 돌 앞에서 눈 뜨면 사랑이 이루어진단다.
교토의 랜드 마크이기 때문인지 벚꽃 시즌과 단풍 시즌이 아닌데도 바글바글하다. 말 그대로 인산인해. 키요미즈데라는 이 번이 네 번째인가 그런데 여러 번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슈 진자를 본 건 처음이었다. 눈 감고 걸어볼까 하다가 포기했다. 팔자에 있음 생기겠지. ㅋ
원래 이 구도로 사진 찍으면 본당이 멋지구리하게 나와야 하는데... 공사 중이라 볼 품 없다. -_ㅡ;;;
적당히 구경하고 사진 찍다가 내려왔다. 그러고보니 키요미즈데라는 정문 쪽으로 안 가고 후문 쪽으로 올라가면 입장료를 내지 않는 게 가능한 구조다. 즉, 역진입하면 돈 안 내고 들어갈 수 있다. 그런 걸 제지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 헤이안 신궁 】
아침도 안 먹고 나왔기 때문에 다들 배고파했다. 큰 길에 있는 우동 가게에 들어가서 우동 먹고 나왔다. 일본에 처음 온 녀석이 헤이안 신궁에 가고 싶다고 해서 버스 타고 이동. 헤이안 신궁은 나도 처음 가보는 거다.
입장료가 없다.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도 많이 찾아오는 곳인 만큼 이 곳 역시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다.
커다랗게 甘酒(감주)라 쓰여 있기에 잽싸게 들어갔다. 단 맛이 강한 술인가? 식혜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들어갔는데... 식혜였다.
한 잔에 300円. 입구에서 책갈피 같은 표를 사서 안에 있는 무녀 복장의 처자에게 건네주면 종이 컵에 감주를 받아 갖다 준다. 쉽게 말하면, 따뜻한 식혜를 3,000원 주고 사먹는 거다. 요즘 사람들은 알랑가 모르겠는데 내가 어릴 때에는 식혜라는 말보다는 감주, 단 술이라고 불렀었다. 앉아서 마실 수 있게 마련한 공간에는 생강 가루가 놓여 있었는데 조금만 넣어도 생강 맛이 확~ 나더라. 생강 싫어하는 사람 엿 먹이기 좋은 마법의 가루라 생각했다. ㅋㅋㅋ
【 긴카쿠지 → 철학의 길 → 에이칸도 → 난젠지 】
사람이 워낙 많기도 하고, 애들이 뭔가 관심 있어 하는 것 같지도 않아서 바로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다음 장소는 긴카쿠지(銀閣寺: ぎんかくじ: 은각사). 아는대로 설명해주면서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여기 매점에서 은가루 들어있는 술도 한 병 샀다. 900円.
상점에서 풍경 하나 살까 하다가 그냥 왔다. 10,000원도 안 하는 가격이라 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데 방 안에 둘 수 밖에 없으니까... 방 안에 바람이 불 리 없으니 풍경 다는 의미가 없다... 고 생각했는데 '히터나 에어컨 바람 닿는 곳에 두면 되지 않을까?' 싶어 다음에 보이면 바로 살 생각이다. ㅋ
나는 킨카쿠지(金閣寺: きんかくじ: 금각사)보다 긴카쿠지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철학의 길과 에이칸도, 난젠지 때문이다. 긴카쿠지에 가면 자연스럽게 철학의 길을 걸어 에이칸도를 본 뒤 난젠지의 수로를 보는 걸로 마무리한다. 벚꽃이 잔뜩 폈을 때 걷는 것도 좋겠지만 그 때에는 사람이 너무 많다. 오히려 요즘처럼 사람이 많지 않을 때 걷는 것도 나쁘지 않다(하지만 벚꽃이 가득할 때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올 봄에 도전해보려고 한다. 벚꽃 시즌에는 비행기나 숙소 구하는 게 쉽지 않아서 포기했었는데, 봄에 날 잡아서 숙소 잡은 뒤 새벽에 일찌감치 출발해서 사람 없는 철학의 길 벚꽃에 도전해보려고 한다.).
처음 왔을 때보다 가게가 많이 늘어난 것 같은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게는 모빌을 팔고 있는 곳. 없어졌나? 하고 걱정스럽게 찾아봤더니 그대로 있다. 안으로 들어가 구경을 했는데, 마음에 딱! 드는 게 하나 있다. 3,000円 조금 안 되는 가격인데 살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결국 돈 없으니까 참자고 포기했는데 지금은... '살 걸...' 하고 후회한다. 다음에 가게 되면 사들고 와야겠다. 그 때까지 있을지 모르겠지만.
철학의 길을 천천히 걸어 에이칸도(永観堂: えいかんとう: 영관당 - 소리나는대로 읽으면 에이칸토우가 되겠지만 실제로 들리는 건 에이칸도로 들림)까지 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살짝 투덜댄다. 많이 걸었다는 거다. 하...
'어디 갈래?' 라고 하면 '나는 어디를 가도 상관 없다' 고, '알아서 하라' 고 해놓고는, 여기 가면 이게 맘에 안 든다, 저기 가면 저게 맘에 안 든다,... 아니, 그럴 거면 본인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라고, ㅆㅂ!
단풍 시즌이 아니기 때문인지 에이칸도는 한적했다. 혼자 가면 한 시간 가량 앉아 있는 곳에 퍼져 앉아 뜨거운 물 한 잔 마시고, 녹차도 한 잔 마셨다. 그리고 나서 친구들 안내하고.
처음 에이칸도에 갔을 때에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한적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어 정말 좋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관광객이 막 늘어나 맘에 안 들었는데 단풍 시즌 끝나고 나서 겨울이라 그런지 한적하더라. 나는 오히려 조용한 에이칸도 쪽이 훨씬 좋았다.
친구들은 별로인지 그닥 리액션이 없다.
아웃 포커스
인 포커스
밖으로 나와 난젠지로 향했다. 난젠지는 유료 시설이 두 군데 있지만 나는 항상 수로만 보고 돌아온다. 굳이 유료 시설 볼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로에 올라가는 곳을 막아놨다. 좀 위험해보이긴 했는데 떨어지거나 하는 사고가 있긴 있었나보다. 근처도 못 가게 막아놨더라.
위로 올라가서 내려볼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저 수로 따라 계속 걸어서 공원 같은 곳까지 갈 수 있고 그랬는데. -ㅅ-
사진 찍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점프하고, 고개를 내밀고, 각양각색의 포즈를 잡고,...
그렇게 난젠지까지 구경하고 기온에 가기로 했다. 가다가 두부 요리 파는 곳이 보이기에 교토에서는 두부 요리가 유명하다고 알려줬는데 한 녀석 빼고는 별로 먹고 싶은 맘이 없어 보인다. 나는 '어디 놀러 가면 (맛집 앞에서 한참동안 줄 서서 기다리지 않는다면) 유명한 요리 정도는 먹어봐야 한다' 고 생각하는 쪽인데 친구들이 다 나와 같지는 않으니까, 뭐.
【 밥 먹고 인형 뽑기 】
전철 타고 기온 쪽으로 갔다. 예전에 제자 녀석들과 같이 먹었던 규카츠 가게에 가면 좋겠는데 찾을 수가 없네. 결국 기온 쪽을 헤매다가 맛집이라 알려진 곳으로 갔다. 잠시 기다리다가 들어가서 밥 먹고, 친구 녀석이 인형 뽑기 하고 싶대서 오락실로 들어갔다.
한참을 망설이고 그러더니 기계 하나 앞에 자리 잡더라고. 그런데 번번히 삽질이다. 그 녀석이 포기한 뒤 다른 녀석이 도전했는데 얘도 삽질. 몇 번 건드리긴 했지만 떨어지려면 멀었다. 그대로 포기하고 가는 게 아쉬우니까 결국 내가 1,500円 투자해서 뽑았다. 내가 쓴 돈만 따지면 본전 뽑고도 남은 거지만 친구 녀석들이 쓴 돈을 포함하면 손해 of 손해. 두 번째 도전했던 녀석이 1,500円 정도 쓴 줄 알았는데 2,500円 썼단다. ㄷㄷㄷ
그렇게 뽑은 게 이 드래곤 볼 피규어. 상자 안 뜯고 그대로 둘 생각이었는데... 이 글 쓰고 나서 포장 뜯어 모니터 앞에 전시하련다.
【 숙소에서 술 처묵 】
숙소 근처에 마트도 없고 편의점도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기온에서 장을 보기로 했다. 친구 녀석들이 편의점에서 술과 먹거리를 사는 동안 나는 버스를 어디에서 타야 하는지 검색하고 정류장 찾아다녔다.
무사히 버스를 타고 숙소에 도착. 후다닥 씻고 나서 맥주를 마셨다. 날마다 술을 제법 많이 사는데도 남김 없이 다 먹어 치운다. ㅋㅋㅋ
【 셋째 날, 기온 시조 】
여행 셋째 날. 아침에 일어나 일기 예보를 보니 비가 온다고 되어 있다. 응? 잽싸게 밖을 보니 땅이 다 젖어 있다. 이미 비가 내린 모양. 다행히 나가야 하는 시간에는 비가 오지 않는 것으로 나온다. 이 날 숙소를 옮겨야 하기 때문에 비가 오면 귀찮아진다.
씻고 짐 정리를 한 뒤 시트를 걷어내 로비로 갔다. 유난히 꾸물거리는 S 기다리느라 로비에서 멍 때리고 있었는데 그 잠깐 동안 손전화 충전한답시고 K가 로비의 콘센트에 충전기를 꽂았다. 잠시 후 할머니 한 분이 오셔서 충전하는 거 너희들 거냐고 물어보더라. 순간 아차! 싶었다. 일본은 공공 시설, 심지어 회사에서 충전하는 것도 전기 도둑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그 할머니는 우리에게 괜찮다고 웃으며 자리를 떴지만 스태프에게 뭔가를 한참 말하더라고. 괜히 한국 사람들 욕 먹인 게 아닌가 싶어 미안하고 그렇더라(그 할머니가 우리를 한국인으로 생각했는지, 중국인으로 생각했는지, 알 수가 없지만.).
캐리어를 끌고 다닐 수 없으니까, 일단 기온 시조에 가서 짐을 보관하기로 했다. 버스로 기온 시조까지 간 뒤 코인 라커 위치 물어보려고 인포메이션 센터로 가고 있는데 친구들이 막 부른다. 코인 라커 어디 있는지 찾았다면서. ㅋ
터치 스크린 방식의 신형 코인 라커가 한국어를 지원하기에 어렵지 않게 캐리어를 보관할 수 있었다. 1,000円 짜리 보관함에 캐리어 네 개가 다 들어가기에 조금은 절약할 수 있었다. 원래는 700円 짜리 라커에 캐리어 두 개씩 넣을 생각이었으니까.
캐리어 보관한 뒤 밥 먹으러 갔다. 배 고프다고 징징거릴 거면 숙소에서 간단하게 요기해도 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싫다고 했으면서 빨리 밥 먹자고 궁시렁 궁시렁. 이번 여행에서 먹을 걸 정할 때마다 짜증스러웠다. '뭐 먹을래?' 하면 뭐 먹겠다고도 안 하고, 아무 거나 괜찮단다. 그래놓고 '이거 먹을래?' 그러면 싫단다. 보통은 내 주장이 가장 강하고 다음이 S, K와 Y는 따라오는 입장인데 S가 뭔가 결정하지 못하고 멈칫거리니까 지켜보는 내 입장에서는 속이 터진다.
망설이다 선택한 게 라멘. 고베규는 비싸다며 못 먹겠단다. 그러다 다시 먹자고 마음 바꿔 들어가려는데 그 잠깐 망설이는 사이에 대기가 생겨버렸다. 결국 기다리기 싫다며 라멘 먹으러 가려다가 오므라이스 가게 발견. 첫 날 라멘 먹었으니까 오므라이스 먹자고 해서 급하게 메뉴를 변경했다. 밥 먹고 나와 코 앞에 있는 야사카 신사에 갔는데... 포장마차들로 가득하다. 신사 주변에 이렇게 가게 많은 건 처음 봤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굳이 밥 안 먹고 포장마차에서 군것질로 배 채워도 됐을텐데.
보는 둥 마는 둥 야사카 신사에서 나와 근처의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Y가 커피를 샀다. 커피 마신 후 밖으로 나왔는데 S가 기온 거리의 분위기에 반해 보고 가잖다. 천천히 걷다가 겐닌지에 도착. 나도 여기 처음이라며 들어갔더니 한 달 전에 왔던 곳이네. -_ㅡ;;; 입장료 내야 하는 곳이라서 어떻게 할 거냐 했더니 안 봐도 된단다. 그래서 그냥 돌아나왔다.
【 킨카쿠지 】
숙소에서 기온까지 오면서 지나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가는 거라서 후시미 이나리로 가는 게 어떻겠냐 물어봤더니 킨카쿠지가 낫겠단다. 그래서 버스 타고 다시 킨카쿠지 쪽으로 갔다.
【 니조 성 】
천천히 구경하고, 사진 찍고. 다 본 뒤 밖으로 나왔다. 기념품 산다기에 잠시 기다렸다가 버스 타고 니조 성으로 향했다.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는데 먼저 온 다른 버스 타버렸더니 중간에 한 번 갈아타야 했다. 멍 때리고 있었음 지나쳤을 건데 다행히 적절한 타이밍에 내려서 잘 갈아탔다.
니조 성은 예전에 왔던 곳이지만 그 때에는 한국어 가이드를 빌리지 못했었다. 500円 내고 음성 가이드 빌렸는데... 친구 녀석들과 속도 맞추느라 제대로 설명을 못 들었다. 다음에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리가 로얄 호텔 】
니조 성을 보고 나서 기온 시조에 맡겨놓은 캐리어를 찾으러 갔다. 버스를 탔는데... 한참 가서야 뭔가 쎄~ 하다. 아까 봤던 풍경이 나오는 거다. 화들짝 놀라 우르르~ 내렸다. 확인해보니 반대 쪽에서 버스를 잘못 탄 거였다. 길을 건너 다른 버스를 타고 기온 시조에 도착. 캐리어를 꺼낸 뒤 전철을 타고 숙소로 향했다.
이 날부터 이틀 간 잘 곳은 리가 로얄 호텔. 1층의 가게에서 파는 행성 초콜릿으로 유명한 곳이다. 여행 오면서 한 번 정도는 묵어보려고 했는데 1박에 20만원 정도 하는 곳이라 내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웠다. 비수기라 그런지 침대 네 개짜리 방이 하루에 21만원 정도 밖에 안 한다. 한 사람 당 5만원 조금 넘는 수준이니까 비싸지 않은 편.
예전에는 체크 인 하면서 "아이 해브 리저베이션." 이라고 말했으니까 자연스럽게 영어로 설명을 해줬는데 이제는 "인타네토데 요야쿠 시마시타." 라고 하니까 당연하다는 듯 일본어로 설명해준다. 전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아는 단어 몇 개 들리는 걸로 대충 이해하고 고개 끄덕이며 넘어간다.
방에 들어갔다가 바로 다시 나왔다. 밥 먹으러 가야 했다. 호텔 근처에는 식당이고 뭐고 아무 것도 없기에 호텔 셔틀 버스를 타고 우메다까지 가기로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교바시에 가도 될 것 같아 전철 타고 그 쪽으로 가자고 계획을 바꿨다. 교바시의 상점에 가니 친구들 얼굴에 화색이 돈다. 교토보다 오사카가 좋다는 거다. 뭔가 활기찬 분위기란다. ㅋ
오코노미야키 먹자고 하기에 대기표에 이름 써가며 기다렸다. 주문한 음식 나오자마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워버리고, 근처의 KFC에서 닭 산 뒤 숙소에 복귀. 호텔 가까이에 오아시스가 있기에 술이랑 먹을 거 사들고 다시 방으로 갔다. 만날 저녁마다 술. ㅋㅋㅋ
【 넷째 날, 각자 놀기 】
다음 날은 각자 흩어지기로 했다. S는 히메지 성 보러 갔다 온다고 새벽에 일어나 먼저 나갔고 K와 Y는 오사카 성을 비롯해 여기저기 보러 간단다. 나는 집에 다녀오기로 했다.
캐리어 끌고 근처 역까지 걸어간 뒤 전철 타고 집에 왔다. 3일만에 오는 집인데 왜 이렇게 반갑냐. 우편함 열어보니 마사미 님이 보낸 엽서가 있더라. 만날 받기만 한다.
【 도톤보리 카니도라쿠 본점 】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슬슬 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갔다. 도톤보리에서 친구들 만나 예약한 카니도라쿠에 갔다. 예약한 시간보다 15분 정도 일찍 갔는데 바로 들어가게 해주더라. 밥 먹는 동안 S는 부지런히 사진 찍고.
【 쿠시카츠 다루마 분점 】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싸서 좋아하고. 2차로 쿠시카츠 먹으러 갔는데 길바닥에서 먹자니까 춥다고 궁시렁. 결국 한 바퀴 빙~ 돌다가 쿠시카츠 다루마 분점을 우연히 발견했다. 거기에서 쿠시카츠랑 맥주 먹었다. S는 실내에서 흡연해도 되냐면서, 된다고 하면 담배 피울 기세로 물어본다. 생각이 있는 놈인지 없는 놈인지. 넷 중 둘이 안 피우는데 거기에서 담배 피우겠다고 설친다. 짜증스러워서 먹던 거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가니 담배 피운다며 기다리란다. 내가 ㅆㅂ 뭐가 아쉬워서 저 담배 피우는 거 옆에서 쳐다보면서 간접 흡연해야 되는데? 먼저 큰 길로 가서 기다리겠다며 나오다가 드럭 스토어 발견. 같이 있던 K가 살 게 있다고 하니 들리기로 했는데 가게 안에 들어가면 담배 피우고 온다는 S와 Y가 우리를 놓칠 수 있으니 길에서 한~ 참을 기다렸다.
【 돈키호테 갔다가 호텔로 복귀 】
S는 퍼펙트 윕 열 개를 부탁 받았다는데 그 드럭 스토어에서는 세 개 밖에 못 산다고 해서 결국 돈키호테로 이동했다. 쇼핑하고 난 뒤 숙소로 돌아가려고 우메다에서 호텔 셔틀 버스 타려는데 세 놈이 다 오전에 호텔 셔틀 버스 타놓고 어디에서 내렸는지 기억을 못한다. 결국 인포메이션 센터에 물어보고 어쩌고 해서 겨우 막차 탔다. ㅋ
S가 호텔 1층의 비싼 자동차 사진 찍는 동안 우리는 편의점에 갔다. 오아시스는 이미 문 닫은 시각. 편의점에서 맥주랑 간단한 안주만 사는데 돈 들고 있는 S가 안 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방으로 간 줄 알고 방에 갔단다. 술 살 거 뻔히 알면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Y가 계산하고 S한테 돈 받는 식으로 처리했다.
【 S와 다투다 】
방에서 술 마시다가 S랑 싸웠다. 싸웠다고 하는 건 좀 뭐하고, 다퉜다 정도가 맞겠네. 일본에서 공부하는 게 좋냐, 한국에서 회사 다니는 게 좋냐고 물어보는데 누가 들어도 '너는 결혼도 안 하고 홀 몸이라 일 안 하고 좋지 않냐' 는 뉘앙스였다. 나름 고생한다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생각없이 말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았던지라 나름 쌓인 게 있는데 불알 친구라는 게 저 따위로 말하니 나도 발끈했다. 그럼 너도 가정 포기하고 유학와서 공부하랬더니 오히려 저가 더 난리다. 내가 언제 그런 식으로 말했냐면서. 내 자격지심 때문에 자기가 하지도 않은 말로 흥분한단다.
여행 기간 동안 S가 함부로 내뱉은 말 때문에 짜증스럽긴 했다. 어디 갈 건지 정하랬더니 별 말 안 하기에 K의 의견 위주로 일정 짜서 움직인 건데 저녁에 제 부인한테 전화해서는 내가 엄청 끌고 다녀서 무지하게 걸었다는 식으로 말하지를 않나. 제 아버님이 다른 사람이 눈살 찌푸릴 정도로 담배를 피운다는 얘기를 해놓고 저도 똑같이 애먼 곳에서 담배 타령하지를 않나.
물론 그렇게 따지면 친구들한테 막말하고 상스런 말 하는 건 내가 압도적으로 1등이다. 그러니 실은 할 말이 없지. 그런데도 서운하더라. 그리고 생각했다. 이제 얘들하고는 여행 다니지 말아야겠다고. 혼자 다니는 게 훨씬 즐거운데, 뭐가 아쉬워서 얘들이랑 스트레스 받으며 다녀야 하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S랑 다니지 말아야겠다인데 모임에서 S만 뺄 수 없으니 내가 나가는 수밖에.
이런저런 대화하면서 느낀 거지만, 내가 그렇게 경계하고 피하려드는 꼰대의 모든 모습을 S에게서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S나 K, Y가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안 했다. 공익과 사익 사이에서 망설임 없이 사익을 추구할 녀석들이고, 지지하는 정당만 봐도 그렇고, 착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고맙고 좋은 친구니까 만나서 수다 떨고 술 마시는 게 즐거웠다. 하지만 이제는 아닌 것 같다. 내가 용인할 수 있는 인간 관계의 범주를 벗어나버렸다.
아직 얘기 안 했는데... 지금 시각이면 한국에 도착해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거다.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도 없네. 그런 거 보낼 정도의 녀석들이 아니란 건 안다. 이 글 마무리하고 나서 나는 앞으로 같이 여행 다니지 않겠다고 이야기 해야겠다. 25년 동안 알고 지내며 제법 오래된 우정인데 이렇게 끝나나 싶다.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내가 제일 문제인 것 같기는 하다.
아무튼... 이번에 친구들과 여행하면서 말 함부로 하지 말자,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한테 더 조심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나도 친하다는 이유로 막말하고 그랬는데 심각하게 반성했다. 듣는 걸 더 많이, 말은 최대한 아껴서라는 생각도 했다. 내 생각이나 경험과 다르다고 목소리 높여 상대가 내 의견에 공감하게끔 만들지 말자는 생각도 했고.
아무튼... 언성이 높아지긴 했지만 서로 조심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말싸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 만드는 것 같아 적당히 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때 S와는 더 상종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무리하고 잤다.
【 마지막 날 】
다음 날 일어나 친구들은 짐 정리하고 씻은 뒤 나갔다. 나는 열한 시에 문 여는 초콜릿 가게에서 초콜릿 사려고 안 나갔다. 호텔 방에서 작별 인사하고. 애들이 휘젓고 나간 화장실 보니 가관이다. 나는 숙소를 이용한 뒤에도 최대한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가는 편인데 화장실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진짜... 혼자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리한 뒤 밖으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엄청 피곤해서 낮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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