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쓴 글에서 고베에 갈 생각은 안 했었다고 했는데, 나라 역시 마찬가지. 교토는 내가 좋아하는 전국 시대(戰國 時代)와 관련된 장소가 많아서 여러 번 갔지만 나라는 보다 고대의 역사와 관련된 장소라서, 고대사는 그닥 좋아하지 않기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안 했다. 센베에 환장하는 사슴에게 피 같은 돈을 쓰고 싶지도 않았고.
하지만 골든 위크라서 열흘을 내리 노니까, 집에만 있기 심심하니까, 오사카랑 교토는 꽤 돌아다녔으니까, 가보지 않은 곳으로 가자 싶어 나라에 가기로 했다. 킨테츠線과 JR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내가 사는 곳에서는 JR 타는 게 편하다. 원래는 아침 일찍 출발할 생각이었는데 피곤해서 아침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열시에 일어났다. 날씨가 좋아서 빨래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세탁기를 돌려놓고 그동안 준비를 했다. 빨래 널고 나서 밖으로 나가니 열한 시. 너무 늦은 게 아닌지 걱정 됐지만 일단 텐노지駅으로 갔다.
전철에 타니 빈 자리가 꽤 있다. 자리 잡고 앉으니 잠시 가다가 규호시駅에서 멈춘다. 농구하러 갈 때 이용했던 적이 있는 역. 그리고 이내 다시 출발하는데 속도가 꽤 빠르다. 더구나 역과 역 사이가 멀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오사카, 교토, 고베에 갈 때 보이던 도시적인 풍경이 아니라 오카야마 같은 시골스러운 풍경이 펼쳐졌다는 거다. 그냥 나라까지 가면서 보는 풍경만으로도 진작에 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나라에 도착. 내리는데... 내리는데... 허... 사... 사람이... 엄청나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 전철 안에 타고 있었다고? 싶을 정도로 엄청난 사람이 내린다. 플랫폼은 순식간에 사람들로 가득 차버렸다.
꿈틀꿈틀(?) 움직여 밖으로 나갔다. 인포메이션 센터가 안내되어 있기에 거기로 가서 한글 지도 하나 집어들고, 차례를 기다렸다가 고후쿠지까지 가는 길을 물어봤다. 고후쿠지에서 도다이지까지는 얼마나 걸리냐고 물어보니까 15분 정도란다.
밖으로 나가니 날씨가 엄청나게 좋다. 긴 팔 입고 있었는데 계속 후회했다.
가는 길에 보여 들어간 자그마한 절에는 부처님 발바닥 자국이... -_ㅡ;;;
고후쿠지까지 가는데 나랑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기모노 입은 처자가 영어로 말을 건다. 중국인이냔다. 하아... 쟤들은 대체 왜 중국인이냐고 물어보는 거야? 아니, 일본에서 동양 사람 만나면 일본인이냐고 묻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에 가서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한국 분?' 하는 거랑 같은 건가?
아무튼. 아니라고 했더니 일본 사람이냐고 물어본다. 한국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고 대화 끝.
그런데 뒤에서 종종종 오더니 다시 영어 할 줄 아냐고 물어본다. 조금 할 줄 안다고 하니까 계속 말을 건다. 혼자 왔냔다. 혼자 왔댔다. 어디에서 왔냔다. 오사카에서 왔댔다. 너는 어디에서 왔냐니까 나고야에서 왔단다. 나고야에 사는 친구가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단다. 왜 혼자 왔냐고, 친구는 어디 있냐고 하니까 친구는 이미 도착해 있단다. 아, 그러냐... 하고는 더 할 말 없어서 아무 말 안 하고 있다가 길 건너면서 흐지부지 됐다. 간만에 영어 써서 멍~ 해졌다. ㅋ
고후쿠지 역시 사람들로 가득. 이 때 이미 마음 먹었다. 대충 보고 돌아가자고.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다음에 좀 한가할 때 다시 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뭔 여관 이름을 대불관이라 지었다냐. -ㅅ-
이미 다른 블로그에서 숫하게 본 경고문. ㅋㅋㅋ
아무리 신들이 타고온 동물이라 해도 그렇지, 얘들은 너무 팔자 좋은 녀석들이다.
└ 저대로 늘어져 있으면 사람들이 자꾸 가서 센베를 준다. 못 먹여서 안달이다.
사람이 너무 많으니 아무 것도 못하겠다. 길가에 야타이(노점)가 잔뜩인데 거기에서 뭐 하나 사먹으려 해도 줄을 서야 했다. 일본 3대 박물관 중 하나라는 국립 박물관에 들어가는 표 사는 것도 한참 줄 서야 했고. 박물관 들어가면서 혹시 유학생 할인 없냐니까 없단다. ㅋㅋㅋ
박물관 치고 입장료가 너무 비싸다 생각했는데, 옆에 있는 불상 전시관 입장료가 포함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1,500円은...
어차피 보는 거, 제대로 보자 싶어 음성 가이드를 빌렸는데 그것도 유료다. 520円. '이 정도 쯤이야.' 라 생각했지만 정신 차려보면 6,000원 가까운 돈. ㅠ_ㅠ
안으로 들어가니 일본 국보를 전면에서 보기 위해 또 줄을 서야 했다. 줄의 맨 끝에서 보는 데까지 50분 걸린다더라. 얼떨결에 줄 섰는데 50분까지는 안 걸린 것 같지만... 굳이 안 서도 되는 줄 서느라 진이 다 빠져 버렸다.
나오면서 저렴한 기념품 몇 개 사고, 불상 전시관 들어갔는데 힘들어서 아무 것도 눈에 안 들어온다. 배도 고프고 발도 아프고. 결국 대충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밖으로 나갔다.
도다이지에 갔지만 역시나 사람에 치여 너무 힘들다. 여름 방학 때, 비 내리는 평일에 다시 오기로 다짐하고 역으로 돌아갔다. 가던 중 술 파는 가게 발견!
그렇다. 나라에 간 이유 중에는 술 사는 것도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일본 술이 '風の森'인데 이게 나라의 술이다. 가게 안에 들어가니 유자가 들어간 달달한 술이 보여서 일단 한 병 집어들고, 風の森 찾아보니 냉장고에 들어 있다. 녹색 라벨 붙은 걸 하나 꺼낸 뒤 계산하러 가지고 갔다.
뭐라 뭐라 하시는데 못 알아듣겠다. 일본어가 아직 미숙하다고 하니까 대뜸 영어로 말씀하신다. ㄷㄷㄷ 일본어 배운답시고 영어 능력이 퇴화되어 영어도 제대로 못 알아듣겠다. 듣고 나서 '에?' 하고 있으니 다시 말씀해주신다. 집에 언제 가냐는 거였다. 아, 오늘 간다고 하니까 얼마나 걸리냐고 물어보신다. 40분이면 간다고 했다. 반드시 냉장고에 넣으라고 강조하시더라. 음... 風の森는 냉장 보관 안 하면 큰 일 나는 술인가 보다.
녹색 라벨이랑 빨간 라벨이랑 뭐가 다르냐고 물어보니까 쌀이 다르단다. 내가 늘 마시던 게 뭔지 몰라서 일단 빨간 것도 한 병 샀다.
땀 뻘뻘 흘리면서 텐노지駅으로 돌아왔다. 소중한 風の森를 병 째 꺼내서 코딱지만한 잔에 따라 마시는 건 경우가 아니다 싶어 1合 짜리 주전자(?) 사러 로프트에 갔다. 예전에 살까 말까 망설였던 거, 결국 사게 되네.
편의점에 들러 오징어 안주랑 아이스크림 사들고 집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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