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유학한다고 했을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부럽다'였다. "아니, 뭐가 부러워요? 본인도 하면 되죠." 라고 하면 그 때부터 유학을 떠날 수 없는 온갖 사정이 줄줄줄 나온다. 열에 아홉이 '결혼한 사람이 가정 내팽개치고 어떻게 그러냐' 인데, 나는 결혼 안 해봐서 모르겠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결혼했다는 이유로 하고 싶은 거 못하고 사느니 혼자 살겠다 생각했고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내 귀에는 그저 현실에 안주하는 게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보다 쉽기 때문에 안 한다 정도로 밖에 안 들린다.
아무튼... 부럽다고 하는 이유를 캐물으면 회사 안 다니고 공부만 하면 되니 얼마나 좋냐고 한다. 그래? 정말 그래? 음... 일단 맞다. 회사 안 다니는 건 좋다. 같잖은 것들 안 봐도 되고, 무능한 것들이 장 자리 차고 앉아 여럿 고생시키는 꼴 안 봐도 된다. 개뿔 능력도 없고 의욕도 없는 것들이 뭐라 하면 갑질한다고 염병하는 꼴 안 봐도 되고. 하지만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회사 다닐 때 안 하던 걱정이 새로 생기니까 만사 태평하게 희희낙락 살 수는 없는 거거든.
당장 수입이 줄었다. 보너스니 뭐니 다 빼고 그냥 월급으로만 따져도 평소 받던 돈의 ⅓ 이하로 확 줄었다. 그걸로 생활이 될 리가 없으니 모아놓은 돈 까먹으면서 살아야 하는데 모아놓은 돈도 얼마 안 되니 항상 돈, 돈, 따져가며 살아야 한다. 한참 어린 동생들과 밥 먹고 나서 호기롭게 지갑 터억! 꺼내 쏘고 싶지만 마음만 간절할 뿐, 나눠 내자고 하게 되는 거다. 그렇게 10년 동안 모아놓은 돈 다 까먹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한국에 가면 빈털털이가 되는 거다. 뭐, 남들처럼 몇 억씩 대출 받아서 집 살 생각 없으니까 1억 정도만 대출 받아서 반은 집 사고 반은 차 사서 천천히 갚으면서 살 생각하고 있긴 한데... 조금 암울하긴 하다.
거기에다 나이 먹고 머리는 굳을대로 굳었는데 젊은 친구들한테 밀리지 않으려고 아둥바둥하다 보면 절로 피곤해진다. 돈 떨어지면 이 나이 먹고 아르바이트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다 늙은 사람도 써주려나? 싶기도 하고, 쓸데없는 걱정을 사서 하고 있노라면 내가 왜 여기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회사 다니는 것보다는 지금이 즐겁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에도 스틸야드 가서 응원하는 것보다 원정 경기장에서 응원하는 걸 즐겼다. 우리가 소수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초딩들의 도발, 은근한 견제 등이 다 좋았다. 알게 모르게 전해져오는 찌릿찌릿한 긴장감 따위가 즐거웠다. 지금이 그런 것 같다. 아무리 날고 기었다 한들, 나는 결국 외국인일 뿐이다. 거기에다 일본에서 취업을 노리거나 하지 않고 돌아간다는 의지가 확고부동한 사람이니, 잠시 머물 사람인 거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즐기면서 받아들이면 나쁘지만은 않다.
모든 게 한국에 있을 때보다 힘들어졌다. 집도 작아지고, 차도 없어지고, 돈도 부족하고, 이래저래 아둥바둥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한 달 정도 살아보니 의외로 얻어지는 게 많다. 일단 한국에서는 뭐든 버리는 게 아까워서 기를 쓰고 모은데다 나는 여분이 준비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성격이라 뭘 사더라도 하나씩 더 사다보니 짐이 잔뜩 늘었다. 그러니 큰 집을 얻어도 항상 비좁아졌다. 여기에서는 집이 워낙 좁으니 뭘 하나씩 더 사서 쌓아놓을 생각 자체를 안 한다. 2년 정도 살고 나면 항상 여분을 준비하는 버릇 같은 것도 적당히 고쳐질 것 같다. 거기에다 하루에 한 끼 내지는 두 끼를 먹는데 그마저도 한국에서처럼 막~ 먹지는 않으니까 살이 빠지고 있다. 한국에 있을 때처럼 시도 때도 없이 내키면 배달 음식 시켜먹는 일이 아예 없어지니까 확실히 빠진다. 뭐, 무엇보다 큰 영향을 끼치는 건 술을 덜 마시는 거고.
일본 와서 보니 눈길을 주지 않는 게 어려울 정도로 희한한 패션 센스를 가진 사람을 많이 보게 된다. 짧은 미니 스커트에 분홍색 스타킹을 신은 할머니도 봤고, 머리 가운데만 남기고 빡빡 밀었는데 그 가운데 머리는 잔뜩 힘줘서 세운 사람도 봤다. 그런 사람들 틈에서, 한국에서는 애처럼 입고 다닌다는 나는 정말 평범한 거다. 그러니 남 눈치 안 보고 내키는대로 입고 다닐 수 있고, 피해주지 않는 범위에서 하고 싶은 거 하고 다닐 수 있는 거다. 거기에다 뭔가 좀 서투르고 어색해도 외국인이니까, 말을 제대로 못하니까라는 면죄부가 주어진다. 아직은 그렇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이제 겨우 한 달 지났을 뿐이지만, 확실히 회사 다닐 때보다는 즐겁다. 공부하는 데 있어 뒤쳐지면 안 된다는 중압감이 있긴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이겨내야지. 마음 같아서는 2년이 아니라 한 10년 공부하다 갔음 좋겠다. 항상 돈이 문제지.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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