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40세 남성이라면 장가 가서 애 키우며 회사 다니는 게 일반적일테지. 회사 사람들도 그렇고, 고등학교 동창들도 그렇고, 보통의 삶이 저런 게 아닐까 싶다. 나는 그 범주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는 사람. 장가도 안 갔고, 당연히 애도 없다. 그 와중에 회사 쉬고 유학을 결심해서 저질러버렸으니, 보통의 범주 안에서 본다면 상당히 이상한 사람일테지.
무엇보다도 집이 있어야 한다는 게 우리나라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버는 족족 써버렸기 때문에 집이 없다. 은행 빚 내서 30년 동안 갚아가며 집 장만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다는 게 내 생각. 2년 마다 꼬박꼬박 이사 다닐지언정 전세나 월세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는. 더 나이 들면 또 어떻게 바뀔랑가 모르겠지만.
한국에 집이 없으니, 그동안 잔뜩 불려놨던 짐을 둘 곳이 없었다. 다행히 고모가 혼자 사시는 집에 빈 방이 있어서 거기에 짐을 다 부려놨더랬다. 5톤 트럭으로 한 가득이었지. 당장 일본에서 필요한 것들로 짐을 꾸렸는데 나름 줄이고 줄였는데도 우체국 6호 상자로 네 개나 나오더라. 24인치, 20인치 캐리어 두 개를 가득 채웠고.
그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안 쓰다가 버리고 가는 것들도 있고, 비싸게 사서 똥 값에 넘기게 된 것도 있다. 그런 걸 생각해보니 그냥 없는대로 와서 조금 불편하게 살다 갈 것을, 괜히 욕심 냈고나 싶더라.
보낼 건 다 보냈고, 남아 있는 건 20인치 캐리어에 넣은 뒤 그 20인치 캐리어를 24인치 캐리어에 넣어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가지고 갈 수 있는 양이 줄어든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가, 20인치 캐리어는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주기로 했다. 다행히 Lさん이 가져가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지.
간사이 공항의 입국 면세점에서 산 양주도 두 병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어떻게든 처분해야 했다. 술을 가지고 배에 탔다는 사람도 있는 것 같던데 어찌 되었든 홈페이지에서는 술 가지고 못 탄다고 공지하고 있으니까.
저녁에 Lさん이 집에 왔고, 둘이서 오랜만에 일 잔 했다. 나는 도수 쌘 술은 쥐약인데 조니 워커 12년산이 40도짜리더라. 그래서 콜라를 타 마셨다. 한참을 수다 떨며 부지런히 마셨고, Lさん과 헤어졌다.
캐리어에 이것저것 챙겨주고, 더 챙겨주지 못해 미안함 맘과 함께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 나갔는데, 품 속을 뒤적거리더니 편지를 전해주더라. 손을 흔들고 방으로 돌아와 읽어봤다. 그래도... 1년 6개월, 헛 살지는 않았고나 싶더라.
예전에, 처음 본사에 들어갔을 때였다. 그 전에도 안면이 있던 사람인데 목과 어깨가 뻣뻣~ 하더라. 내가 그 사람한테 업무로 뒤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거니와 그런 자신감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내 앞에서 그렇게 뻣뻣할 수가 없는데, 엄청 고자세더라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뻣뻣함의 이유를 알게 됐다. 본사는 처음이니까 구조도 모르고, 돌아가는 시스템도 잘 모르니 하나부터 열까지 물어봐야 하는 것들이었다. 자기는 아는데 나는 잘 모르니까, 그걸 벼슬처럼 여기고 있더라. 시간이 지나면 나도 곧 익숙해질 것들인데 말이다.
저 냥반은 나중에 다른 곳에서 만났는데 거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기가 나보다 먼저 와서 익숙해져 있다는 이유로 또 목에 힘 주더라고. 한 마디 해줄까 하다가 참았다. 대신에 내가 그 곳의 환경에 익숙해지자마자 나보다 일찍 와서 더 잘 알텐데 왜 이런 것도 모르냐고 쏴주었다.저 냥반의 뻣뻣함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했다. 처음이라 익숙하지 않은 사람, 어색한 사람 앞에서 그 사람보다 먼저 경험했다는 이유로, 익숙해져 있다는 이유로 건방 떨지 말자고. 그래서 내가 먼저 몸 담고 있는 곳에 새로운 사람이 오거나 하면 최대한 먼저 말 걸고, 필요한 거 없나 물어보고, 누가 보면 오지랖 떤다고 할 정도로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아, 물론 상대가 여자인 경우에는 쓸데없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일부러 먼저 말 걸고 그러지 않았다. 나름 소심한 아저씨다, 내가. -ㅅ-
Lさん이 처음 왔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10월에 입학해서 이미 3개월 동안 학교의 시스템에 익숙한 상태였는데 Lさん은 1월에 입학해서 모든 것이 어색할 때였다. 게다가 수업도 50% 밖에 못 알아듣겠다고 하더라. 나는 먼저 경험했으니까, Lさん보다는 조금 더 아니까,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었다. 그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그런데 그게 그렇게 고마웠던 모양이다. 몇 번을 고맙다고 했었는데, 편지에서 또 고맙다며 인사를 했더라. 지금은 Lさん이 나보다 훨씬 일본어도 잘 하고, 인기도 많고, 여러 가지로 나보다 나은 사람이 되었는데도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참 좋은 녀석이라고, 한국에 돌아가서도,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가 되어도, 꾸준히 연락하고 지낼만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역시, 모두에게 인기가 있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른 것 같다.
간만에 양주를 마셨는데 부대끼거나 힘든 게 없었다. 하긴 젊었을 때 양주 먹고 맛탱이 간 건 워낙 개처럼 먹었으니까 그런 거고. 오늘은 딱히 할 일이 없다. 짐이나 정리할까 싶은데 그마저도 그냥 내일로 미룰까 싶다.
우체국에서 상자 하나 더 사야 하나 고민했는데 피규어도 그렇고, 버리기 아까워서 어떻게 하지 못하고 있던 것들을 Lさん이 다 가져가줬다. 따로 뭔가를 더 보내거나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일 가전 제품 수거하는 업체에서 오면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책장 정도만 처리하고, 나머지는 내가 버리겠다고 해서 스티커 붙여 내려놔야겠다. 그리고 나서 캐리어에 남은 짐 다 때려 넣고, 방 청소 싸악~ 하고. 27일 아침에 일찌감치 일어나 샤워하고, 이불 싸서 버리고. 그러고 나면 끝. 계속 이어질 것 같았던 일본 생활이 끝난다.금요일에 비가 올 거라고 한다. 시간이 갈수록 비 올 확률이 줄어드는 일본이다 보니 그 때 가봐야 알겠지만 지금 예보대로라면 50%가 넘으니까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 처음에 일본에 와서 지금 이 집에 들어온 날도 비가 왔었다. 우산도 없어서 비 맞으며 편의점까지 걸어가 도시락을 사들고 온 기억이 생생하다. 그 때 우산을 샀었던가?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1~2년 지나면 일본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아련하게 떠올라 너무나도 그리워질 거라 생각했는데, 굳이 그 때까지 갈 것도 없다. 벌써부터 이 코딱지만한 집이 그리워진다. 날마다 보던 하루카스도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풍경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시원섭섭하다는 표현이 있는데 시원한 맘은 1도 없고 그저 섭섭하기만 하다. 한국에 돌아가면 새로운 즐거움, 괴로움,... 여러가지 일들이 있을테지.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되고, 마음이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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