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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일기

2020년 02월 26일 수요일 흐림 (此処らでやめる / 僕はここまで)

by 스틸러스 2020.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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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앞에 두 갈래 길이 펼쳐져 있다. 한 쪽은 보도블럭으로 깔~ 끔하게 포장된, 양 쪽으로 예쁜 꽃들이 늘어서 있는 길이고, 다른 한 쪽은 쓰레기와 개 똥 따위가 널려 있는, 누가 봐도 더럽고 기분 나쁜 길이다. 어느 길로 가겠냐고 물었을 때 망설이는 사람이 있을까? 대부분이 전자를 선택하겠지.

  • 하지만 내 앞에 두 갈래 길이 있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고 그게 어떤 길인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어떨까? 이 경우에는 누구라도 쉽사리 결정하지 못할 거다. 게다가 어느 길로 가더라도 장애물이나 싫어하는 게 나온다면 '다른 길로 갈 걸...' 하고 후회하게 될 거다. 그게 당연한 거다.

  • 나 같은 경우 '일본 유학' 이라는 길과 '회사의 머저리들을 참고 버티는 것' 이라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회사를 계속 다니는 길은 똥 밭이었고, 일본 유학의 길은 확실히 보이지 않지만 적어도 똥 밭은 아니었다. 어떤 길이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미미하게나마 향기도 나고, 뭔가 기대되는 게 있는 길이었지. 그래서 선택이 어렵거나 하지 않았다. 진급이 코 앞에 있었던지라 다들 진급하고 가라 말렸지만, 진급을 위해 정신이 나가 미쳐버리는 걸 선택할 수는 없었다.

  • 지금은 '공부를 계속하는' 길과 '돌아가는' 길의 갈림길 앞에 서 있다. 유학을 선택할 때처럼 어느 한 쪽이 확실히 나쁘다면 망설이지 않을텐데, 두 길 모두 앞이 보이지 않는다. 어느 쪽이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는 거다.




  • ○○○의 담당자에게는 어제 연락이 왔다. 이걸 어제라고 해도 되나? 23시 55분에 카톡 메시지가 왔더라. 자고 있었다.

  • 휴직 연장 승인이 났단다. '너무 일찍 연락해준 덕분에 등록이 안 될 것 같다.' 고 했더니 바로 전화 오더라. 안테나가 다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어져버린다. 다시 전화가 걸려 왔지만 전혀 들리지 않는다. 맥도날드에 가서 와이파이에 연결한 뒤 전화를 할까 하다가 그냥 유선 연락처를 달라고 했다. 국제 전화를 거는 게 속 편하다.

  • 전화를 걸어 상황을 얘기했다. 미안하단다. 하... 미안하다라...

  • 금요일에 한 번 연락을 주지 그랬냐고 하더라. 짜증이 왈칵! 밀려왔다. 카톡으로도 얘기했고, 메일로도 얘기했다. 21일까지 사무실에 통보해줘야 하는데, 그 때까지 휴직 연장에 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학비 납부를 연기해야 하니까 그거라도 알려달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답장조차 안 해놓고, 이제와서 연락이라도 한 번 해주지 그랬냐고?
    막 쏟아부을까 하다가 간신히 이성을 찾고, 최대한 정중히 얘기했다. 카톡 메시지 보냈는데 한 달 넘도록 읽지도 않고,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해서 무시 당하는 기분인데 다시 말하고 싶겠냐고. 메일로 분명히 얘기했는데 이제 와서 무슨 말이냐고.
    어쨌든 자기 불찰이니 미안하다고 하더라. 마음이 약해서 미안하다는 사람 앞에서 차마 더 화를 못 내겠더라. 일단 학교에 가서 등록 가능 여부를 물어보고 다시 연락주겠다고 했다.



  • 1교시가 시작되자마자 선생님께서 사무실 호출 쪽지를 주시더라. 날짜를 보니 어제다. 1교시를 마치고 바로 2층으로 갔다. 쪽지를 들이밀었더니 한국 담당자를 불러 준다. 오늘이 학비 납부 마감일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댔더니 수업 마친 후 다시 얘기하자고 한다. 일단 알겠다 하고 교실로 돌아가다가 빈 교실에 들어가 ○○○ 담당자한테 전화했다. '학비를 납부하면 등록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내가 지쳐서 공부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돌아가겠다.' 고 했다. '휴직을 연장해서 2년 공부하는 건 네가 바라던 일 아니냐?' 라고 한다. 그렇긴 한데, 심신이 지쳐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수업을 마친 후 상담하기로 했는데 상담 후 결과를 알려주기로 했다.

  • 오전 내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일본에 남아 계속 공부하는 게 당연히 더 낫다. 회사로 돌아가 일할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온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금전적인 여유가 없다. 저금했던 돈은 진작에 다 떨어졌고, 지금은 은행 빚으로 살고 있는 신세. 만약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다면 한국에 돌아가자마자 또 빚을 내야 한다. 계약한 차가 나오더라도 차 값은 고사하고 등록세, 취득세도 못낼 판이다. 그러니 계속 공부한다면 4월부터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한다. 문제는, 하고 싶지 않다는 거다.

  • 한국에 돌아가면 지긋지긋한 회사 생활이 다시 시작된다. 하지만 금전적으로는 더 여유로워질 수 있다. 계약한 차가 나온다면 혼자 차박 다니면서 여유로운 생활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분명한 것은, 한국에 돌아가도 '그냥 일본에 남아서 더 공부할 걸...' 하고 후회할 게 분명하다는 거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 즉 남아서 공부한다고 해도 '그냥 돌아갈 걸...' 하고 후회하게 될 거다. 그 때에는 이미 늦는 거다. 학비는 반납이 안 되니까.

  • 결국 선택은 나의 몫이다. 담당자의 연락이 하루만 늦게 왔더라면 담당자 핑계를 댈 수 있었다. 일 처리를 그 모양으로 해서 내가 이렇게 됐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학비 납부 마감일에 연락이 왔고, 학교 쪽에서는 받아주겠다고 한다. 이제는 학업을 계속하느냐, 포기하느냐는 온전히 나에게 달린 거다.

  • 점심 시간에 마사미 님과 통화를 했다. '회사로부터 허가는 났지만 계속 망설이고 있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고 말씀드렸다. 역시나 마사미 님. 그런 상태인데 무리해서 공부할 필요가 있냐고 하신다. 역시 맺고 끊음이 확실하시다. 좀 더 고민해보고 연락드리겠다고 했다.

  • 오후에는 수업 듣느라 딱히 고민할 시간이 없었지만, 그만두는 걸로 마음을 정했다. 3층에서 수업이 있었는데 그나마도 3분 정도 빨리 끝나서 종 치자마자 2층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담당자가 나를 보더니 한 쪽 구석의 상담실로 안내한다. 2층에 저런 상담실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 그냥... 담담하게 얘기했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예전에는 공부하는 것도, 학교에 오는 것도 즐거웠지만, 이제는 의무로 오는 것 같다고. 계속 망설이고 망설였지만, 역시 이쯤에서 그만두자고 생각한다고.

  • 내 앞에 커다란 벽이 서 있는 것 같다고 얘기했다. 실력이 당최 늘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담당자는 나이 40이나 먹고 애새끼처럼 징징거리는 나를 다독거려 주었다. 많이 늘었다고. 지금까지 열심히 했다고. 심지어는 오늘이 학비 납부 마감일이지만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면 일주일 뒤에라도 학비 내고 다음 학기 공부를 해도 된다고 했다. 지쳐 있다면 지금처럼 열심히 공부하지 말고 대충 설렁설렁 다니더라도 괜찮다고까지 했다.

  • 알겠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하려면 굳이 일본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 생각했다. 지금 우리 반에 Aさん이라는 한국인이 있는데, 날마다 지각하고, 학교 와서는 자는 게 일이다. 수업 중에 선생님이 깨워도 자고, 어디 읽어보라고 하면 못 찾고 헤맨다. 저럴 거면서 왜 학교 오나 싶다고, 볼 때마다. 혼자 공부 안 하고 마는 것도 아니고 수업 분위기를 깨니까. 게다가 저 사람이랑 짝이 되어 연습해야 하는 경우라도 있게 되면 골치 아파진다. 의욕이라도는 전혀 없는 사람과 얘기해야 하니까. 그런데 나보고 그렇게 해도 괜찮으니 더 공부하라고? 절대 안 될 일이다.



  • 말이 길어졌지만, 결론은... 학교를 그만두기로 했다는 거다. 3월 13일이 기말 고사인데 그걸 마지막으로 끝이다. S쨩이 졸업하는 사람은 기말 고사 안 봐도 된다고 하기에 물어봤더니, 안 된단다. 졸업하려면 기말 고사는 무조건 봐야 한단다.

  • 게다가 농담처럼 20년 후에 회사 은퇴하고 다시 공부하러 오겠다고 했더니, 그 때에는 유학 비자가 안 나올 거란다. 이미 유학 비자를 받아서 1년 6개월 간 공부를 했으니까 다시 발급이 안 된단다. 그 때에는 단기로 들어와 공부하거나 해야 한단다.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지금 기준으로 한 번 입국하면 3개월까지는 있을 수 있으니까 3개월마다 왔다갔다 하면서 공부해도 될 일이고... 유학을 그만둔다고 해서 일본과 아예 연을 끊고 산다는 건 아니니까. 아마도 최소한 1년에 한 번 정도는 여행 차 오지 않을까 싶다. 마사미 님과의 인연도 계속 이어가야 하고.

  • 돌아오면서 월세를 냈다. 통장에는 딱 다음 달 월세 낼 돈만 남았다. 전화해서 3월에 방 빼겠다고 해야 하는데 2개월 전에 말하지 않으면 위약금을 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위약금이 얼마인지 모르니까, 처음 일본에 왔을 때 썼던 계약서를 확인해봐야 한다. 위약금보다 월세 내는 쪽이 낫겠다 싶으면 4월 분까지 내고 계약을 해지하는 게 낫다. 방이 망가진 부분에 대해 보상해야 하는데 나는 바닥이 걱정이다. 여름에 바닥에 끈적끈적해지기에 물티슈로 박박 문질러 닦았더니 니스 칠해 놓은 것 같이 반질반질한 부분이 벗겨지더라고. 이거 물어내라고 할까 걱정이다.

  • 우체국에서 상자만 구입한 뒤 후나빙, 배로 한국까지 실어나르는 것도 신청해야 한다. 옷과 책은 이렇게 보낼 생각이다. 모니터, 프린터,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책상 따위는 중고로 팔아야 하는데 차가 없으니 누가 가져갈까 걱정이다. 이불이랑 러그 같은 건 따로 신고해서 돈 내고 버려야 하고.

  •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당장 내일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 오늘은... 그냥 좀 퍼지자. 술이나 마셔야겠다고 생각한다. 다음 학기 등록을 안 하니까 생활비도 굳고, 400만원 가까운 학비도 굳었다. 청춘 18 티켓을 이용해서 규슈 쪽을 여행하고 도쿄에도 짧게 다녀오자 싶은데, 코로나 19 때문에 가능할랑가 모르겠다. 한국에서의 감염자가 1,000명이 넘어버려 일본보다 심각한 상황이니까. 뭐, 나는 한국에 다녀온 게 작년 12월이 마지막인지라 딱히 문제는 안 될 것 같지만.

  • 정확히 한 달 전만 하더라도 중간에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자는 마음은 1도 없었다. 무조건 올 해 9월까지 공부하겠다는 마음이었다. 4월에 오사카 성으로 벚꽃 보러 가겠다는 생각도 하고, 올 여름도 일본에서 보낸다고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불과 한 달 사이에 이렇게 바뀌는고나. 이럴 수가 있고나.

  • 최근에 자꾸 결석하고 그러니까 선생님이 뭔가 이상하다고 했다더라. 하긴... 한국에 병원 치료 차 간다고 조퇴 두 번 한 거 빼고는, 아! 술 쳐먹고 술병 나서 결석한 적도 한 번 있고나. 아무튼. 결석 한 번, 조퇴 두 번 빼고는 99%에 가까운 출석율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리 빠지고 그러니까 이상했겠지.
    담임 선생님과 면담할 때까지만 해도 2년을 채울 생각이었는데... 담임 선생님께는 라인으로라도 말씀 드려야겠다. 그 전에 나카모토 선생님과 마사미 님에게도 말씀 드려야지. ○○○ 인사 담당자에게는 저녁에나 카톡 보내서 돌아가겠다고 할 생각이다.

  • 뭔가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하는 기분이라 찝찝하다. 하지만 이대로 남아 계속 공부한다고 일본어가 더 늘 것 같지도 않다. 물론 처음 일본에 왔을 때와 비교한다면 엄청 늘었다. 하지만 그 뿐이다. 그 때와 비교해서는 안 된다. 일본에서 보낸 시간이 있는데.

  • 막상 돌아가기로 결정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여행이 아닌 유학으로 일본에 와서 난바에 있는 캡슐 호텔에 간 것도 기억이 생생하고, 다음 날 비가 오는 와중에 계약서를 쓰고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왔던 것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오카야마까지 걸어가겠다고 큰 소리 쳐놓고 히메지까지 130㎞ 걷다가 포기한 것도 생각나고, 야간 버스 타고 가서 당일치기로 후지산에 올라갔다 온 일도 어제의 일 같다. 청춘 18 티켓으로 홋카이도까지 갔던 것도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지는 일이다.

  • 일본 유학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할 수 없었을 일이 잔뜩이다. 그러니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다. 내 성격 상 2년도 되지 않아 일본 유학 시절을 그리워하게 될 거다. 일본 여행을 와서 일부러 지금 사는 집까지 와서 사진 찍고 궁상 떨 게 분명하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돌아가는 걸 선택했다. 일본에서의 생활이 더는 즐겁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 나도 내 맘을 모르겠다. 나이는 먹었지만 나는 아직도 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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