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포장일기

2020년 03월 12일 목요일 맑음 (一日中部屋でごろごろ)

by 스틸러스 2020. 3. 12.
반응형
  • 날씨가 엄청나게 좋다. 이 맘 때의 일본은 구름이 낮게 떠서 하늘이 참 예뻐 보인다. 일본에서 인생 사진을 건졌다는 글을 종종 볼 수 있는데 낮은 구름 덕분이다. 구름 한 점 없는 파~ 란 하늘의 날씨라면 한국과 별 다를 게 없지만, 구름이 좀 있는 날씨라면 일본 쪽의 구름이 확실히 낮다. 한국과 비행기로 한 시간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 신기한 일이다.

  • 이렇게 좋은 날, 자발적 자가 격리 중이다. 코로나 증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확진자와 같은 공간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귀찮아서 밖에 안 나가고 있는 거다.

  • 일본에 와서 학교를 다닌 지 얼마 안 됐을 때, 조금이라도 빨리 일본어가 늘었으면 하는 욕심에 교류 센터에서 진행하는 수업을 들었더랬다. 그 때 레벨 테스트를 위한 사전 인터뷰가 있었는데 비 오는 날은 뭐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마침 며칠 전에 인터넷에서 だらだら(다라다라)라는 표현을 본 적이 있어서 "家でだらだらしています。(이에데 다라다라 시테이마스. - 집에서 빈둥빈둥하고 있습니다.)" 라고 했다.
    네일베 사전에서 だらだら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1. ‘たらたら1’의 힘줌말; 액체가 이어서 흐르는 모양: 줄줄.

    2. 완만한 경사가 길게 뻗쳐 있는 모양.

    3. 진력이 나도록 길게 끄는 모양: 질질.

    4. 흘게가 늦거나 야무지지 못한 모양.

  • 하지만 저 중에 だらだら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 게 없다. 다른 설명 중에 '의욕을 잃어 흐리멍덩한 모양' 이라는 게 있는데 차라리 저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우리 말로 하면 빈둥빈둥 정도가 가장 적당하지 않을까 싶은데, 아무튼. 일본에 온 지 두 달 정도 됐다는 초급자가 갑자기 저런 말을 쓰는 게 신기했는지 인터뷰하시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엄청 웃었던 기억이 난다.

  • 시간이 지나 일본어를 조금 더 공부하다보니 '빈둥빈둥' 은 'ごろごろ(고로고로)' 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는 걸 알게 됐다. 오늘 하루종일 저 상태였다. 정말, 딱 저 단어가 어울리는 상태였다.

  • 어제 한 잔 마실까 하다가 간에도 쉴 시간을 주자 싶어서 안 마셨거든. 20시도 안 되어 드러누웠는데 유튜브 하나만으로 네 시간을 까먹었다. 자정이 넘어 잠이 들었는데 네 시가 안 되어 깼고, 또 다시 태블릿을 붙잡고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여섯 시가 넘어 다시 잠이 들었고, 여덟 시에 눈을 떴다.

  • 원래 계획대로라면 발딱! 일어나 씻고 학교에 가야 했지만, 열 시까지 가자, 열한 시까지 가자, 열두 시까지 가자,... 계속 미루다가 결국 16시가 넘어버렸다. 내일이 시험인데, 어제 교과서 찔끔 본 게 전부. 개 깡이다.

  • 저녁을 먹긴 해야겠는데 라면은 지긋지긋한지라, 도미노에 피자를 주문했다. 쿠폰을 이용해서 반 값 정도에 주문을 했는데, 형편 없다. 일단 맛이 없어. 토핑도 부실하고, 커팅도 제대로 안 되어 한 조각 뜯어내려고 하니 뉴질랜드 모양으로 뜯겨져 올라온다. 하아...

  • 덩치가 엄청 작은데 미친 듯 먹는 사람들이 많잖아? 키노시다 유우카나 쯔양 같은 사람들에 비하면 쨉도 안 되겠지만 1990년대 후반에는 나도 덩치에 비해 많이 먹는다는 말을 들었더랬다. 52㎏인가 그랬는데 피자 한 판을 먹었으니까.
    지금도 피자 한 판은 우습지만 체중이... -_ㅡ;;;   아무튼, 얼마 안 먹을 것 같아 보이는데 많이 먹는 사람들을 보면 먹는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포만감을 느끼는 건 뇌의 역할인데 빨리 먹으면 위가 찼음에도 배가 부르다는 신호가 뇌까지 못 간다는 거다. 별로 안 믿기지만, 그렇단다. 그래서, 오늘은 일부러 엄청 천천히 먹어봤다. 중간에 콜라도 마셔가면서. 그랬더니! 정말인 것 같다. M 사이즈 반 판씩, 합쳐서 한 판을 먹었을 뿐인데 배가 살짝 부르다.

  • 좀 쉬다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피자를 먹자 생각하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식거나 말거나 맛에 별 차이가 없다. 나의 최애 피자 도미노가 이 따위라니. 피자헛도 그렇고, 일본의 브랜드 피자는 정말이지 대책이 없다. 일본인들은 피자다운 피자를 먹지 못하고 있어!

  • 내일이 기말 고사인데 별로 걱정이 안 된다. 어떻게든 되겠지, 이런 생각인 거다. 하지만 교과서는 한 번 정도 보고 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문제는, 오늘은 전혀 공부하고 싶지 않다는 거다. 일단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간만에 맥도날드에 갈까 싶다. 아침에 두 시간 정도 책 좀 보다가 가서 시험 보고 올까 싶은데, 어떻게 될지.

  • 내일 시험이 끝나면 홈 룸이 있고, 그 후에는 끝. 졸업식도 없을 듯 하니 내일이 학교에 가는 마지막 날이 아닐까 싶다.

  • 유학을 오기 전에도, 유학을 오고 나서 휴직을 연장하려 할 때에도, 연장된 휴직을 취소하고 복직하려 하는 지금도, 이래저래 속 썩이는 일들이 생겼지만 결국 내가 바라는대로 흘러갔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자. 신경쓰지 말자.

  • 다만, 2주 정도의 시간이 있으니 그 동안 여행이라도 다녔음 좋겠는데 코로나 19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겠다. 검사 대상자가 형편없이 적기 때문에, 그리고 올림픽을 앞둔 아베 정부가 보도를 막고 있기 때문에 일본이 조용해 보이는 거지, 까발려지면 우리보다 심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민당과 아베는 이럴 경우 화살을 우리나라 쪽으로 돌릴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러니 빌미를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 아무튼... 일본에서 보내는 날이 하루, 하루, 줄어간다. 뭔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기분이다. 벌써부터 이런데... 돌아가는 날 질질 짜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찌릿찌릿하다.


반응형